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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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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02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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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사
먼저 미사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같은 뜻인 제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제사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하고 하느님의 높으신 전능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경신행위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절대자임을 인정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바치며, 간구하는 종교적인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를 말한다.
구약의 제사를 보면,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몇 가지만 보기로 하겠다.
우선 카인과 아벨의 제사를 볼 수 있는데, 인류 역사 초기에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난 카인과 아벨이 각각 야훼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살찐 양을 바친 아벨의 제사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셨고, 곡물을 바쳤지만 성의없이 바친 카인의 제사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온갖 타락에 빠져 죄에 물든 인간 세상을 심판하는 무서운 홍수에서 구함을 받고 야훼 하느님께 드린 노아의 감사제와, 적을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멜키세덱은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빵과 포도주를 제물로 바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파라오로부터 해방되어 나올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놓아 그날 밤에 주님의 천사들이 에집트의 맏아들을 모두 죽일 때, 그 죽음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녀들이 해방되었음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 기념제사를 빠스까(지나감)라고 말하고 해마다 이 기념제사를 지내고 축하했던 것이다.
구약의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따라 구분하면, 양, 염소, 소 같은 희생물을 제단에서 피를 흘려 죽이는 혈제(血祭)와 밀가루, 빵, 포도주, 곡식, 향유 등을 바치는 무혈제(無血祭), 그리고 짐승을 죽일 뿐 아니라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燔祭)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드리는 목적에 따라 구분을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흠숭제(欽崇祭)와,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기 위하여 드리는 감사제(感謝祭), 필요한 은혜를 청하기 위하여 드리는 기원제(祈願祭), 그리고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드리는 속죄제(贖罪祭)가 있다.
구약의 빠스카 만찬의 순서를 보면 개회식에서
첫째, 술잔을 채워서 마심.
둘째, 종살이와 탈출의 긴박함을 의미하는 쓴 풀과 누룩 없는 빵을 먹음.
셋째, 고양(高揚)의 준비.
넷째, 가장 나이가 적은 아이의 질문과.
다섯째, 가장(家長)의 답변이 있음.
여섯째, 시편 112 - 113,8을 읽음.
일곱째, 본 만찬으로서 빵의 축성이 가장(家長)의 감사의 기도로 이루어짐.
여덟째, 둘째 잔을 마시며 식사를 함.
아홉째, 축복의 잔인 셋째 잔을 마심. 여기에서도 가장(家長)의 감사의 기도가 있다.
열번째, 시편 113,8 - 117장까지 읽음.
마지막으로 제 4의 잔을 마심. 이렇게 구약의 빠스카의 만찬은 모두 11개의 순서로 되어있다.
한편 구약의 제사를 완성시킨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제사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제사를 통하여 당신 백성들을 준비시킨 다음,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하느님께 완전한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다. 당신의 죽음을 하나의 제사로 생각하셨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한 마리의 속죄(贖罪)의 양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기 전에 사도들과 최후 만찬을 하시면서 '이것은 내 피이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이다'(마태 26, 27-28)라는 말씀으로 새로운 계약을 통해 맺으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미사를 당신의 제헌(祭獻)을 계속하고자 하셨다.
2. 미사
미사성제는 크게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나눌 수 있는데, 말씀의 전례 앞에 시작예식을 넣고 성찬의 전례 다음에 마침예식을 넣어, 전부 시작예식,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 그리고 마침예식, 이렇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작예식 부분에는 입당송과 사제의 인사, 그리고 참회예절, 자비를 구하는 기도, 대영광송이 있고, 끝으로 모음기도인 본기도가 있는데, 이러한 시작예식의 목적은 한데 모인 교우들이 한 몸을 이루어 공동체가 되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미사를 합당하게 거행하도록 준비시키는 데에 있다.
그러면 시작예식 부분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 입당송 : 입당은 성전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입당송은 미사예절을 시작하고 집회의 일치를 강화하며 교우들의 마음을 전례시기와 축제의 신비로 인도하고 사제와 봉사자들의 행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 인사와 성호경 : 인사는 제단에 입을 맞추거나 깊이 숙여 절을 하는데, 한국교회에서는 깊이 절을 하는 것을 택하였다. 제단에 절을 한 후에 장엄미사 때에는 분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십자성호를 긋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구원을 드러내며 그리스도께 우리가 속해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십자성호는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의 신비와 이미 받은 세례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 참회예절 : 참회예절은 미사성제를 시작하면서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를 먼저 주님 앞에 뉘우치고 고백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는 예절로서, 전 공동체의 공동고백으로 이루어지며 사제의 사죄경으로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미사 중의 참회예절은 형식적인 예절이 되어서는 안되며, 실제로 대죄가 있을 경우에는 개별고백을 해야 되지만 소죄나 미소한 죄가 있을 때에는 이 예절에서 죄를 뉘우치고 성체를 영함으로써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다.
◐ 자비송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하는 이 자비송은 주님을 부르며 그 분의 자비를 간청하는 노래이다. 이 자비송은 우리들의 이 미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대한 고백이며,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 공동체의 대답인 것이다.
◐ 대영광송 : 대영광송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성삼위께 영광을 드리는 성시로서, 베들레헴에서 천사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찬미하던 노래로 시작되었다. 대영광송은 성령 안에 모인 교회가 하느님 아버지와 어린 양을 찬양하고 간청하는 가장 훌륭한 찬미가이다. 그리고 이 대영광송은 대림시기와 사순시기를 제외한 모든 주일, 대축일, 축일 및 지역의 성대한 축제 때에 노래하거나 외우는 것이다.
◐ 모음기도 : 대영광송이 끝나면 사제는 모음기도를 바친다. 이 모음기도를 통하여 미사의 성격이 드러나며, 사제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천주 성부께 기도한다. 사제가 기도를 하는 동안 우리들도 사제와 함께 성부께 기도를 드리도록 해야 된다.
말씀의 전례는 성경독서와 독서 사이의 응송과 복음이 있고 복음 후에는 강론이 있다. 그리고 강론이 끝나면 신앙고백과 신자들의 기도가 있다.
◐ 독서 : 평일에는 독서가 하나밖에 없지만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주일과 대축일에는 두 개의 독서를 읽는다. 1독서와 2독서가 있을 때에는 1독서를 주로 구약에서, 그리고 2독서를 신약에서 읽는다. 특히 이 말씀의 전례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과거에는 매년 읽혀지던 성서들이 이제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하느님의 말씀의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도록 신자들에게 성경의 보고를 널리 개방하여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일정한 연수 내에 회중들에게 낭독해 주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3년을 주기로 나누어 놓았다는 점이다.
◐ 화답송 : 제 1독서 후에는 말씀의 전례의 본질적인 부분인 응송이 따른다. 이 말은 옛날에는 층계송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층계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주로 시편이 인용되는데, 이 시편은 독서책에 있는 시편을 사용하는 것이 정상이다.
◐ 알렐루야 : 그리고 제 2독서 후에는 알렐루야를 부르는데, 알렐루야는 사순시기를 제외하고는 항상 노래한다.
◐ 복음 : 복음은 말씀의 전례의 최고의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서, 가능하면 복음은 부제가 봉독하고, 부제가 없으면 다른 사제가 복음을 봉독하는데, 복음을 봉독하기 전에 제대를 향하여 머리를 굽히는데 이것은 복음을 읽을 마음과 혀를 깨끗이 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마와 입술과 가슴에 작은 십자가를 긋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을 머리로 깊이 생각하고, 입으로 고백하고 전하며, 마음 속 깊이 간직하겠다는 뜻이다.
◐ 강론 : 복음 봉독이 끝나면 강론이 뒤따르는데, 강론은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풀이하고 기타 신앙에 필요한 일들을 그 날 전례정신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다. 이 강론에 대하여 미사 경본 총지침에서는 '강론은 전례의 한 부분이며 신앙생활을 양육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매우 권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 신앙고백 : 강론이 끝나면 신앙고백이 있는데, 사도신경은 복음의 말씀에 대한 우리 신앙심의 응답으로서 주의 기도와 함께 초대교회 때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사도신경은 주일과 대축일에 사제와 교우들이 함께 외우는 것으로서, 지역의 성대한 축제에도 사도신경을 욀 수 있다.
이 신앙고백은 우리 공동체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증거하며, 그 공동체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심화시키는 경청된 말씀에 대한 신앙의 응답이다. 또한 신앙고백은 교회와 그리스도를 믿는 전 교회들의 일치를 염원하는 감명깊은 호소인 것이다.
◐ 신자들의 기도 : 그리고 신앙고백이 끝나면 신자들의 기도가 있는데, 신자들의 기도는 신자들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고 공동체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말씀의 전례가 끝나면 바로 성찬의 전례로 들어가는데, 성찬의 전례에는 제물봉헌과 예물준비가 있고 손을 씻는 예식이 있으며, 봉헌기도가 있다. 그리고 환호송인 거룩하시다와 성찬기도, 성체축성, 거양성체, 끝영광송이 있다.
◐ 제물봉헌 : 제물봉헌 때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는 인간의 생명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를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땀을 봉헌하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의 전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 또한 봉헌된 헌금은 우리의 노고와 수고를 담은 것이고, 한 주간동안 받은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기도 하다.
◐ 예물준비 : 사제는 성작에다 포도주를 붓고 물을 섞는데, 이것의 상징적인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희생에 우리의 노고와 희생을 한데 바쳐 하느님께 바친다는 뜻이며, 또한 예수님의 늑방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을 연상시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 손을 씻음 : 손을 씻음은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이 집에서 가지고 온 제물을 사제가 받았으므로 더러워진 손을 씻던 것이 오늘날 예절 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사제가 손을 씻는 것은 사제의 내적 정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손을 씻는 것이다.
◐ 봉헌기도 : 사제는 이 봉헌기도 때에 우리 자신과 제대에 준비된 제물을 축복해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 감사송 : 이 감사송은 그 날 축일의 성격에 따라 다른 것을 보게 되는데,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에 하신 사례하는 감사의 기도이다.
◐ 거룩하시다 : 거룩하시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히브리 백성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던 환호로써, 우리가 미사 중에 '거룩하시다'를 할 때에 환호와 찬미의 자세를 지니고 참다운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 성찬기도 : 성찬기도는 미사성제의 가장 핵심부분으로서 여기에는 4가지 양식이 있다.
1양식은 어떤 미사 때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고, 2양식은 주간의 평일과 특수한 환경(시간이 촉박한 때나, 어린이의 미사)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3양식은 특별히 주일과 축일에 사용함이 좋다. 그리고 4양식은 구원의 역사를 종합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 성체축성 : 축성 전에 사제가 밀떡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향하는 것은 감사와 봉헌의 표시이며, "이는 내 몸이니라, 이는 내 피니라"라는 사제의 선언으로 밀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고,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현존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체와 성혈을 따로 축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거양성체 : 사제가 성체와 성혈을 높이 드는 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체와 성혈을 흠숭하게 하기 위함이며, 복사가 종을 치는 것은 신자들의 온 정신을 제대 위로 집중시키기 위함이다.
◐ 끝 영광송 : 이 기도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노래이며, 이 영광송 끝에 신자들은 "아멘"
이라고 응답을 하는데, 이는 미사의 가장 장엄한 순간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다 바쳐 자신을 제물로 제헌하신 순간을 드러내는 것이다.
◐ 주의 기도 : 이 주의 기도로 성찬식 즉 영성체 부분에 들어간다. 이 기도로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의 빵을 암시하는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또 죄를 깨끗이 씻어 달라고 간청하여 거룩한 빵을 실제로 거룩한 사람들이 받게 한다.
◐ 평화의 기도와 평화의 인사 : 주의 기도를 바친 다음에 사제는 온 세상과 교회를 위하여 평화의 기도를 바친다. 교우들은 교회와 전 인류 가족의 평화와 일치를 간청하고, 서로 평화와 사랑의 인사를 나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축복하는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
◐ 성체를 쪼갬 : 이 성체를 쪼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상징하고, 한 부분을 떼어 성혈에 넣는 것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갈라졌던 몸과 피를 합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식은 성체를 나누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받아 모심으로써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 하느님의 어린 양 : 여기에서 말하는 어린 양은 제물로 바쳐지는 양을 말한다. 이 기도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희생되신 예수께 우리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으로서, 세 번이나 반복을 하면서 주님을 받아 모시기에 부당한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하는 것이다.
◐ 보라 천주의 어린 양 : 사제는 영성체 때에 받아 모실 성체를 교우들에게 보이며 그리스도의 잔치에 초대하는 것이다. 이 때에 우리들은 성서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의 자세를 본받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응답한다.
◐ 영성체 : 초대교회에서는 신자들도 성체와 성혈을 다 영했다. 그러나 신학이 발전함에 따라 빵과 포도주에 각각 완전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을 인정하면서 1415년 콘스탄틴 공의회에서는 신자들의 성혈의 영함을 금했다. 그러나 사목적인 이유에서 특별한 경우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성체와 성혈을 다 모시는 양형 영성체를 허락하고 있다.
◐ 영성체송 : 이 기도문은 그 날 미사와 성체의 신비를 표현하며, 신자들이 영성체를 하는 동안에 부르는 노래이다. 영성체 때에 때로는 성체성가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성체를 영하는 이들의 영신적 일치를 드러내고 마음의 기쁨을 표시한다. 그리고 성체를 모시러 나가는 행렬 속에서 우리는 형제적인 성격을 느낄 수 있다. 만일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경우에는 미사경본의 영성체송을 신자들 전부나 그들 중의 몇 사람 또는 독서자가 읽는다.
◐ 영성체 후 묵상과 기도 : 신자들의 영성체가 끝나면 사제는 남은 성체를 감실에 모시고 성반과 성합과 손에 묻은 성체가루를 물을 부어 깨끗이 영하는데, 이것은 성체께 대한 주의와 공경을 작은 부분에까지도 다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묵상의 시간에 우리 마음 안에 오신 주님과 조용한 대화를 나누면서 성체의 신비를 매일의 생활 안에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 영성체 후 기도 : 이 영성체 후 기도는 그 날 미사와 특히 내 마음 안에 오신 주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로써, 내가 받은 은혜를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때이다.
◐ 사제의 강복 : 옛날에는 주교님들이 강복을 주셨는데, 그 때에는 퇴장하시면서 아무 말도 없이 십자표로만 강복을 주셨다. 그 후 십자표와 함께 강복의 말을 삽입하였다. 그리고 사제들이 미사 후에 강복을 주게 된 것은 9세기부터이다. 이러한 강복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축복을 주신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특별한 날에는 '장엄축복'이나 '백성을 위한 기도'로 축복을 더욱 성대하게 할 수 있다.
◐ 마지막 인사와 파견 : 미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사는 그분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지니고 파견됨을 명심케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매일의 생활 속에서 미사 때에 받은 은혜와 결심한 것을 실천해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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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00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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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초의 죄(원죄)
1) 아담의 죄
창세 3,1-24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계명중 하나를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깨뜨리고 하느님을 거역하는 불순종이었다. 이 불순종은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과 악을 아시는 하느님과 같아 지기를"(창세3,5) 원한 데서 출발한다. 즉 자기들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선과 악을 결정하기를 원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척도의 기준으로 삼아 자기를 자기 운명의 유일한 주인으로 놓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기들의 창조주께 종속되기를 거부함으로서 인간을 하느님께 결속시키는 끈을 끊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모상대로 비슷하게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아무 것도 거절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 두시지 않고 당신 생명까지 내놓으시는 분인데(참조 지혜2,23)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와 아담은 무한히 자애로우신 하느님께 대하여 의혹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계명은 하느님께서 당신 특권을 고수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신 술책이 아닌가 하고 또 그 계명에 수반되는 경고는 거짓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이제 인간은 자기의 경쟁 상대로 하느님을 믿지 않게 된다. 즉, 처음에는 하느님을 무한히 완전한 분으로서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무사 무욕하여 베푸시기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 이제는 피조물한테서 자신을 방어하는데 급급하고 이해 관계에 몰두하는 하느님으로 여기게 된다. 이렇게 죄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자체를 파괴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정신적 부패보다 더 근본적인 타락은 없는 것이다.
2)죄의 결과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양심의 가책은 그 한 예이다. 즉, 죄를 짓기 전에는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던 아담과 하와는 잘못에 따르는 벌을 받기도 전에 벌써 하느님 야훼를 피하여 동산의 나무 사이에 숨게 되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인간은 자기 편에서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여 하느님을 기피한다. 그러니까 낙원에서의 추방도 인간의 그러한 마음을 확인해 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추방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경고가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을 떠나서는 생명의 나무에 가까이 갈수 없게 됐고(창세 3,22) 결국 결정적 죽음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추방됨으로서 이때부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갈라 놓았으며 또한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도 분열을 일으키게 됐다. 그 사실은 이미 낙원에서 살았던 최초의 남녀 사이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죄를 범하자마자 아담은 하느님께서 자기의 반려자로 주신 자기 여인을 고발하면서 연대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이 분열은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며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사실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최초의 죄에 대한 이 이야기는 인간에게 하나의 희망을 안겨다 주는 요인을 제시하고서야 끝을 맺는다. 물론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독립하려다가 도리어 벌로 추락된 노예 상태는 본래 언제까지나 계속될 결정적인 것이었다. 또 일단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는 그것은 계속 불어 날 뿐이었고 죄가 증가됨에 따라 생명은 감소의 길을 걸었으며 마침내는 대홍수로 인해서 단절되게 되기까지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저버리는 것은 인간측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을 회복하는 화해는 하느님 편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최초의 죄의 이야기 안에는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몸소 이 화해를 실현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다(창세3,15). 인간이 경멸한 하느님의 선하심이 끝내는 승리하게 됨을, 즉 창세기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자비가 움트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2. 이스라엘의 죄
1) 금송아지의 경배
예전에 이스라엘은 자기편의 아무 공로도 없이 오직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지상의 모든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되고 특별한 사랑을 받아 하느님의 장자라는 특전을 입게 된다. 즉,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의 노예 생활과 하느님을 섬길 수 없는 죄의 땅에서 해방 시키기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신 구원 사건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안다. 이러한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이었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모세에게 "증거의 판"(출애31,18)을 주심으로서 풀릴 수 없는 관계를 맺으시는 바로 그 순간에 이스라엘은 아론에게 "우리 선두에 서서 거닐 신을 만들어 주시오"(출애 32,1)하고 청하게 된다.
즉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표징으로 당신의 성실하심을 증명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야훼께서 너무 멀리 계시고 보이지 않는 분으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야훼께 대한 참 신앙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가까이 있고 희생 제물을 바침으로 그 진노를 가라 앉힐 수 있는 신, 달리 말해서 그들이 "하느님과 함께 걷는" 대신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어 주기를 원하는 자기 중심적인 하느님을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최초의 죄는 순명의 거부였음을 보았다. 그것은 좀더 깊이 고찰해 볼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 자신을 위탁하기를 거부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와 더불어 바알을 예배하려는 유혹, 즉 우상숭배에 빠질 때 현저하게 드러난다.
금송아지의 이야기에 이어서 신명기 9장 22절에는 이스라엘의 또 다른 하나의 죄를 들고 있다. 그것은 탐욕의 죄이다. 이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기적적으로 내려주신 만나보다 그들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더 좋아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민수11,4-6참조).
그들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위탁하기를 거절하고 하느님께서 광야의 영적 체험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신명8,3참조) 거절한다. 그들의 탐욕은 충족되지만 아담에게서와 같이 하느님의 길을 그들의 길로 대치할 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를 경험한다(민수11,33).
2)예언자들이 고발하는 죄
예전에 이스라엘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예언자"라고 하며 그들에게 있어서 죄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의 실현을 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며 유일한 장애물이라고 했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죄는 매우 구체적인 실체로 사람들이 야훼를 저버림에 따른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들은 폭력, 약탈, 부정한 재판, 허위, 간통, 위증, 살인, 폭리, 권리 침해 등이며 한마디로 사회적 질서의 파괴라고 보았다.
이사야라는 예언자는 '하느님과 백성을 갈라 놓는'(이사59,2) 이 죄악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죄의 고백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실상 우리의 악행들이 우리와 함께 있사오며, 우리가 우리의 잘못들 그것들을 잘 아옵나니, 곧 악을 행하고 야훼를 불신하며, 우리 하느님을 피해 달아나고, 압박과 반항에 관한 말을 하며, 마음으로부터 거짓말들을 지껄였다. 법규는 뒤로 제쳐 놓인바 되고 의리는 멀리 서있을 뿐이고 진실함이 대중 앞에서 짓밟혔고 정직함이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사 59,13-14).
그리고 예언자는 하느님을 떠나서 건방지게 스스로 서고자 하는 자는 타인, 특히 가난한 자와 약자를 짓누른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하느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는 자"(시편 52,9)는 "언제나 악한 뜻을 품고"(시편52,4) 의인은 "언제까지나 주님의 자비에 의탁한다"(시편 52.10)고 보았다. 사무엘 하권 12장에 나오는 "다윗"의 간통죄가 이미 암시하는 것도 역시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삽화는 이스라엘의 죄 관념을 명확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즉, 인간의 죄는 하느님의 권리를 침해할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까지 상해 드린다는 것이다.
3) 하느님께 대한 모욕으로서의 죄
죄가 직접 하느님 자신을 해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해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해친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맞이했을 때(2사무 12,9-10) 단지 한 인간을 상해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권리의 보호자이시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죄는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을 갈라 놓음으로서 그분의 사랑의 계획을 헝클어 놓는다는 의미에서도 하느님을 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의 깊이가 점점 더 계시됨에 따라 인간의 죄가 어떻게 하느님께 "모욕"을 끼치게 되는지 그 참뜻이 더 명백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죄는 자애 깊은 아버지께 대한 아들의 배은망덕한 행위(이사 64,7)라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죄는 본질적으로 어떤 인격적 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죄는 한편으로는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거부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이 보답되지 못함으로 고통당하시는 것, 즉 그분 사랑이 상처를 입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의 신비가 있으며 그 참뜻은 신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히 계시되게 된다.
4)죄의 치유
예언자들이 죄를 고발하고 그 중대성을 분명히 밝힌 것은 백성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회개시키기 위해서 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충실하여도 항상 성실하시고 인간이 당신 사랑을 거절하여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으시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는 한 당신께 돌아오기를 계속 독촉하신다는 것이다.
죄는 사랑의 거부이기 때문에 죄가 제거되거나 용서되는 정도는 인간이 다시 사랑할 것을 어느 정도 수락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하느님께로 되돌아가기를 요구하지 않는 "용서"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부정하면서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자체가 인간의 회심을 강하게 요청한다.
그러므로 인간측에 첫째로 요구되는 조건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 독립되기를 그만두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며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서 죄의 근원적 요인을 단절하는 것이다.
3. 예수님과 죄인들
복음서를 보면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분이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죄의 용서가 결코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변혁 없이 순전히 하느님의 일방적 행위로 이루어진다고는 가르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도 옛 예언자들이나 세례자 요한과 같이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내맡기도록 정신의 철저한 쇄신 즉, 회개를 가르치신다.
그 대신 비유에서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이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나 빛을 거부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분 역시 속수무책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예언자들처럼 가시는 곳마다 죄를 고발하신다. 특히 계명을 규정대로 잘 지키는 것으로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렇게 하신다. 왜냐하면 죄는 사람의 내부에 자리잡고서 거기에서부터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가지의 죄가 나와 삶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로움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는 결국 사랑의 계명으로 귀착된다. 제자들은 스승의 행동을 바라봄으로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랑의 거부인 죄가 무엇인지 조금씩 배우게 된다. 제자들은 특히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예언자들의 교훈과 비슷한 점이 많은 '탕자의 비유(루가15,11-32)'는 신약성서 중의 어떤 비유보다도 죄가 왜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며 용서가 죄인 자신의 회심없이 일방적으로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당치 않는 것인지를 말해 준다.
이 복음 내용을 통해 우리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불순명 보다도 아버지의 마음을 참으로 아프게 했던 것은 아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아 자기 곁을 떠나 갔다는 사실과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식을 사랑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집에 있지 않음으로서 아버지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하여는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서 다시 아들로 대우 받기를 수락하는 길 밖에 없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기쁨을 특히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회개 없이는 이 비유에서 용서를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처음부터 용서하고 있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용서의 힘은 실제로 아들이 되돌아가는 행위를 통해서만 효력이 나게 된다. 죄에 대한 하느님의 이러한 태도를 예수께서는 말씀으로보다도 행동으로서 잘 계시하신다. 예수께서는 비유에 나오는 형처럼 하느님의 자비심을 이해 못하고 이를 곡해하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도 구애되시지 않고 비유의 아버지와 같이 사랑과 보살핌으로 죄인들을 받아들이신다.
4. 자비로우신 하느님
죄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선과 악을 결정하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척도의 기준을 삼아 자기를 자기 운명의 유일한 주인으로 놓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기들의 창조주께 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죄는 또한 아담과 하와가 서로 잘못을 떠 넘김으로서 책임을 회피했듯이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도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같이 죄는 사회적 질서를 파괴시키는 것이며 특히 인격적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우리들이 죄에 대해 보다 효과적으로 회개하기 위해서 이며 하느님과의 은총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다. 더욱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충실하여도 항상 성실하시고 인간이 당신 사랑을 거절하여도 언제까지나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으시며 '탕자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언제든지 되돌아 오기만 하면 용서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 빠졌더라도 이에 절망과 실망이 아니라 희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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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2:59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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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과연 하느님의 모습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성서의 창세기 제 1장 26절을 살펴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 짐승과 땅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들짐승들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라고 적혀 있다.
닮았다고 하는 것은 똑 같다는 말과는 구별이 된다. 닮았다는 말이지 결코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느님이 될 수 없고 그분과 비슷하게 되려고 최대한 가까이 갈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누굴 닮았다고 하는 것은 누구와 비슷하다는 것이지 그 사람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얼굴을 고치고 성격을 개조한다고 하더라도 같은 사람일 수는 없다.
따라서 하느님을 닮은 인간에서 '닮다'라는 표현은 모습이라는 말에 내포된 동등함이라는 개념을 배제시키기 위하여 덧붙여진 것이다. 또한 우리 모습, 곧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이란 동물이 갖추지 못한 인간의 지성, 의지,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하느님께 인간을 다른 피조물의 관리자로 내세우시기 전에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고 이 관계를 통하여 인간에게 마땅한 자격과 권위가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2. 인간 창조의 의미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이 먹을 양식이나 물이나 땅을 만드시지 않으시고 먼저 인간이 필요한 세상을 만드시고 맨 나중에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에 인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인간이 필요한 여러가지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만드셨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은 성서가 하느님께 창조받은 세계가 무엇이며 인간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은 둘 다 인간 창조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하느님을 진흙을 빚는 옹기장이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공통된 표현법이며 이 표현법은 창조 행위를 묘사하는데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귀속되어 있음과 인간의 취약성을 강조하는데 의도 가 있다.
여기서 잠깐 인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느님 ⇒ 사람 ⇒ 짐승 ⇒ 고기와 새 ⇒ 해, 달, 별 ⇒ 땅(풀과 나무) ⇒ 창공(하늘과 물) ⇒ 빛(낮과 밤) 등을 피라밋식으로 그려놓고 볼 때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것일수록 지능이 높은 고등 동물이다. 이것을 보면 인간이 맨 나중에 만들어졌고 인간 위에는 하느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약육강식의 피라밋과 같다.
하느님은 인간을 다스리고 인간은 동물을 다스리고 동물은 식물을 다스리며 식물은 광합성 작용을 통하여 땅을 다스리고 땅은 물을 다스리고 있다. 바로 자기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어있는데, 결국 인간은 창조된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느님과 가장 가깝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하느님께로부터 초대된 것이다. 이는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인간 중심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하고 보존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초대를 받고 있다. 이 초대를 무시하고 거절하면 인류는 동료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태계를 파괴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직권남용인 것이다.
3.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속성
인간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는 많은 말들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은, 예를 들면 영혼, 자유의지, 진, 선,미, 지성, 사유, 등 많은 것들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특별한 것 몇 가지만을 살펴 보자.
1) 영혼의 존재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영혼을 간직하고 있다. 영혼이란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의 입김을 불어 넣으신 것이다. 창세기 1장2절에는 태초에 아무 것도 없었고 하느님의 기운 (영)이 휘돌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으로서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입김을 불어 넣으셔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는 그냥 "있어라" 하셨지 당신이 빚으시고 만드시고 입김을 불고 하시지 않으셨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자유의지의 선용
인간만이 선과 악을 행할 수가 있다. 여타의 다른 피조물들은 선이나 악을 행할 수가 없다. 호랑이가 다른 동물을 안잡아 먹는다고 해서 선이 되거나 다른 동물을 많이 죽인다고 해서 악이 되거나 하느님 대전에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다.
따라서 동물들은 아름다움이나 선을 추구할 수가 없고 그냥 본능대로 행동할 따름이다. 또한 물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를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이 정해주신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낮은 곳으로 흐를 뿐이다.
3) 진, 선, 미의 추구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인간만이 자연을 아름답게 가꾸고 참되고 바른 것을 추구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여 선을 행할 줄 안다. 살아 움직이는 것 중에서 인간만이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굶어 죽을 수가 있다고 한다. 아무리 훈련이 잘된 강아지라 할지라도 먹이를 앞에 두고 굶어죽을 수는 없으며, 오직 인간만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고귀한 힘인 것이다.
4) 인간의 이성
인간만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술에 만취가 되어 본능에 따라 행동할 때 이성을 잃었다고 말한다. 우리말 사전에 따르면 이성이란 이치에 따라 사리를 분별하는 성품인데 인간만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섭리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본능대로 먹고 마시고 싸우고 제멋대로 살아간다면 이것은 인간의 근본 이치를 망각하는 것으로써 인간은 짐승과는 다른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5) 봉사
인간만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희랍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 바와 같다. 오직 인간만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을 수가 있고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할 줄 안다는 것이다.
동물들의 세계를 사회라 하지 않고 무리 또는 군이라고 말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의해서 질서가 잡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자인 호랑이의 우두머리도 힘이 없으면 그 무리에서 쫓겨난다. 허준의 동의보감을 읽어 봤으면 허준의 스승이 허준을 위해, 아니 인간의 의술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행위 등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허준이 그 모습을 보며 인간은 대단한 존재라고 감탄을 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위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위대성을 볼 수가 있다.
실로 인간만이 위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결코 죽음을 좋아하지 않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며 하찮은 벌레일지라도 위험이 닥치면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볼수 있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스스로 죽음을 추구할 줄 알고 삶을 버릴 줄 안다.
6) 인간의 양심
인간의 속성 중에서 특이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의 양심이다. 양심이란 사물의 선악을 구별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취하려고 하는 도덕적 판단으로서, 특히 자기 행위에 대하여 품는 선악에 관한 윤리 의식이다. 이러한 양심은 동물이나 여타의 피조물에는 없다. 이 양심은 인간을 더 아름답게 하고 영혼을 살찌우게 하며 인간의 삶을 더욱 더 풍요롭고 기쁘게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이다.
4. 창조 사업의 협력자로서의 인간
창세기 1장 26절에서부터 31절까지에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구절은 창조 사업의 협력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이다. 이것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모든 이성과 지혜와 의지 등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신의 과업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모든 피조물은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어떤 형태로든 발전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 바로 발전이 없다면 그것은 완성된 것이거나 죽은 것일 것이다.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의 활동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들은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창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창조가 끝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공심판을 나타내며 종말을 뜻한다. 따라서 종말이 올 때 까지 인간에게 맡겨진 것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되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개발하고 발전시키라는 것이지 그것을 파괴하고 멸종시키고 죽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바로 땅을 지배하라고 하심은 이 지배가 창조적이어야 하지 수탈과 파괴로 자행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력은 자유로이 그러나 책임있게 행사되어야 한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 앞에서 세계에 대하여 져야 할 그의 책임을 필연적으로 포괄한다. 오늘의 문제는 인간의 이 권력을 자연을 위해서 어떻게 하느님 앞에 책임있게 사용할 수 있느냐에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세상을 질서있고 조화있게 가꾸며 멋있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생명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5. 인간 활동의 가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에덴 동산을 만드셨으며, 에덴 동산을 돌보게 하셨다. 이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에덴 동산의 완성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담은 에덴 동산을 돌보며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들짐승과 온갖 날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있다. 성서에서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이름을 받는 존재에 대한 주권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 존재에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담은 모든 짐승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짐승 하나하나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짐승을 다스린다는 것은 노동의 행위로서 노동의 신성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사업을 계승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며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취시키는데 개인의 노력으로 이바지한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사목헌장 34항)라고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에 언급된 것처럼 인간의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창조주로 여긴다고 해서 인간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 중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노동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노동이 없을 때 그것은 아주 비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을 통해서 다른 인간에게 봉사할 수가 있고 노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완성시키며 이 사회와 세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노동은 인간 활동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공경하는 것이 될 것이고 먼 훗날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이 지상에서 행한 모든 노동의 대가를 받을 것이다.
6.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자세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위하여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몇 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을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전세계에는 인종갈등, 종교갈등, 민족분규등 수없이 많은 이유로 전쟁과 폭력과 살인을 자행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전쟁이 없었던 때는 불과 300년밖에 안된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다국적기업의 횡포 속에 수백만의 인류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어느 나라에는 쌀이 남아 논밭을 갈아엎는가 하면 어느 한쪽은 수백만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류가 충분히 먹고 남을 만한 식량을 주셨음에도 인간이 피조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분명히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양식을 충분히 주셨고 온갖 짐승과 날짐승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어김으로 인하여 심각한 불평등이 일어나고 있으며 수많은 재난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들은 앞으로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
우선 모든 인간은 똑같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앞에서 인간은 상호 협력하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듯이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야 한다. 똑같은 하느님의 피조물인데 어찌 내 가족 내 국가 내 민족을 구분하여 차별하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똑같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가슴에 새겨 옆의 형제 자매 모든 인간들에게 협력하고 함께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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