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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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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성지'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07.10 파티마 성모 발현지
  2. 2013.11.24 보령 갈매못 성지
  3. 2012.07.08 대구 한티순교성지
2019. 7. 10. 22:18 천주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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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포르투갈의 산악지대인 레이리아(Leiria)교구에 있는

작은 본당인 파티마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신 것을 말합니다.

파티마는 1917년 성모님께서 파티마본당 구역 내의 목장지대인

코바 다이리아(Cova da Iria)에 발현한 이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마리아 성당 중의 한 곳이 되었으며

수많은 순례자가 참배하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났던 나무 부근에는 현재 발현 경당과 함께 발현을 목격한

루시아 수녀의 진술에 의거하여 조각된 성모상이 서 있으며

그 밖에도 병원, 호스피스, 수도단체 등이 파티마에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파티마에서 일어난 성모님의 예언은

모두 다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제 3예언에 대하여서는 최근에 와서

그 궁금증을 풀어 주었습니다.


파티마 발현중 성모님은 3가지 예언을 하시는데

특히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 13일 6회에 걸쳐

발현(發顯)한 성모님의 메세지중

1917년 7월 13일에 전해준 예언이 세가지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러한 발현으로 인해 성모님을 만난 세사람의 어린이 중에 한 사람으로 후에

가르멜회 수녀가 된 루시아가 수녀원에서 이 예언에 대하여 써서 교황청을 통해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

그세가지 내용 중

제1부는 지옥에 대한 부분을,

제2부는 원죄없으신 성모성심으로

러시아인들이 회심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소련 붕괴)이,

제3부는 교회의 대시련을 예고하는 내용을 적혀 있다고 하였으나

문제의 제3부는 루시아 수녀의 간청에 의해 개봉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3부를 `파티마의 비밀'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성모님의 예언의 내용에 대한

신빙성 문제는 가톨릭 교회가 늘 어떠한 계시적 현상이나 발현 등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들이 발생하였을때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것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오랜 세월에 걸쳐 밝혀내기 때문에

그 신빙성은 당연히 100%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 3예언이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고 하지만

결코 그런 내용의 것은 그 내용을 밝히지않은 교황청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추측에 추측이 낳은 하나의 소문내지 괴측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불안과 진실을 알리기 위하여

교황청은 몇년전 그 발현의 내용을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과 차관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대주교는

2000년 6월 26일 교황청 공보실에서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세 목동에게 일어난

성모님 발현에 관한 "파티마 메시지"(The Message Of Fatima)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베르토네 대주교의 서언, 루치아 수녀가 1941년 8월 31일 레이리아-파티마

의 주교에게 보낸 파티마 제1, 제2 비밀 부분, 루치아 수녀가 1944년 1월 3일 작성한

제3 비밀 부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루치아 수녀에게 보내신 2000년 4월 19

일 서한, 루치아 수녀가 2000년 4월 27일 베르토네 대주교와 레이리아-파티마 교구장

주교와 나눈 대화 내용, 교황청 국무원장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이 2000년 5월 13일 히

야친타와 프란치스코 시복식에서 한 연설 그리고 라칭거 추기경의 신학적 해석으로 구

성되어 있습니다.

 

베르토네 대주교는 서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제3 비밀에 관한 루치아

수녀의 글을 공개하기로 결정하셨으며, 이 제3 비밀에 관한 글이 레이리아의 주교와 성

모님의 명령에 따라 1944년 1월 3일에 쓰여졌다고 밝혔습니다. 이 글은 처음에 레이리

아의 주교가 보관하고 있다가 1957년 4월 4일에 교황청 비밀 문서고로 옮겨졌으며,

1959년 8월 17일에는 교황 요한 23세 성하께, 또 1965년 3월 27일에는 교황 바오로 6세

께 전달되었으나 두 분 모두 이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1981년 5월 13일 저격 사건이 있은 뒤 파티마 제3 비

밀이 담긴 글을 요청하셨고, 1981년 7월 18일 교황 성하께 루치아 수녀의 포르투갈어

원문과 이탈리아어 번역문이 전달되었습니다. 이에 교황 성하께서는 즉시 원죄 없으신

성모 성심께 전세계를 봉헌하시기로 하고 몸소 기도문을 만드셨으며, 자신은 참석할

수 없었지만 1981년 6월 7일 성모 대성전에서 봉헌식을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개인적

으로 루치아 수녀는 전세계를 봉헌한 이 장엄 예식이 성모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루치아 수녀는 1982년 5월 12일 파티마 제3 비밀의 해석에 관한 편지

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 보냈습니다.

 

베르토네 대주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파티마 제3 비밀 공개 결정이, 이 시

대가 권력과 죄악을 향한 인간의 비극적 욕망으로 뒤덮여 있지만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

랑과 예수님과 교회의 어머니의 세심한 배려가 충만한 역사의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것

이라고 밝히고, 성모님께서는 인간의 미래가 하느님 안에 있으며 인간은 미래를 창조하

는 데 적극적이고 책임 있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고 호소하신다는 말로 서언을 끝맺습

니다.

라칭거 추기경의 신학적 해석은 세 부분, 곧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그 신학적 위치",

"사적 계시의 인간학적 구조" 그리고 "파티마의 비밀에 대한 해석 시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라칭거 추기경의 설명에 따르면, 공적 계시는 인간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로서 구

약성서와 신약성서에 글로 표현되어 있으며, 사적 계시는 신약성서가 완성된 뒤의 계시

로서 파티마의 메시지가 이에 속한다고 합니다. 특히 공적 계시는 신앙의 대상이지만,

사적 계시는 이 신앙에 이르도록 도움을 줄 뿐입니다.

추기경은 또한 성서적 의미에서 예언은 미래를 미리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하느

님의 뜻을 설명하는 것이며, 따라서 미래를 향한 올바른 길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강조

합니다.

 

추기경은 파티마 제3 비밀을 해석하는 열쇠가 바로 세 번 거듭되는 천사의 커다란 외

침, 곧 "참회하라, 참회하라, 참회하라!"에 있다고 밝힙니다. 시대의 징표를 이해한다

는 것은 곧 참회의 절박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이 순간

에 우리가 해야 할 올바른 응답이라고 합니다. 루치아 수녀는 모든 발현의 목적이 사람

들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이 자라도록 도와 주는 것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추기경은 제3 비밀에 담긴 모습에 대하여, 성모님 왼편에 불칼을 들고 있는 천사는 심

판을 경고하는 것이며 불을 꺼버린 성모님의 광채는 참회를 요청하는 것이라고 합니

다. 여기에서 인간 자유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미래는 사실 변할 수 없는 것이 아닙

니다. 어린이들이 본 모습은 결코 바뀔 수 없는 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이 처한 위험을 보여 주는 동시에 우리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

다.

 

추기경은 루치아 수녀의 글에 나타난 가파른 산, 폐허가 된 거대한 도시 그리고 커다랗

고 투박한 십자가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산과 도시는 인간 역사의 무대입니다. 이 곳

에서 인간은 정상에 오르려고 노력하고 창조성을 발휘하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의 업적

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파괴를 구원으로 바꿉니다. 그것은 역사의 고통을 의

미하지만, 역사에 대한 약속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환시에서 하얀 옷을 입은 주교,

곧 교황의 역할은 특별합니다. 교황이 거의 폐허가 된 도시에서 고통과 슬픔에 싸여 다

른 주교들, 사제들, 수도자들 그리고 다른 여러 신분의 신자들 앞에 서서 시체들 사이

를 지나가는 모습은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으며 폭력과 파괴와 박해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지난 한 세기의 역사가 이 모습 안에 압축되어 있습니

다. 루치아 수녀의 글에는 교황이 산의 정상에 다다랐을 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해

당하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모님의 손'의 도움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

아왔습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불변의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신앙과 기도야

말로 역사를 바꿀 수 있는 힘이며 기도는 총알보다 강하고 신앙은 군대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의 두 팔 아래서 순교자들의 피를 모아 하느님의 길을 충실

히 따르는 사람들에게 뿌리는 천사들의 모습은 피와 눈물을 통한 구원의 희망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파티마 제3 비밀의 결론은 희망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 징표

가 되는 것은 고통받는 교회, 순교자들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겪는 고통

에서 정화와 쇄신의 힘이 나옵니다.

 

라칭거 추기경은 파티마 제3 비밀에서 세상 종말에 관한 계시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는 실망스럽겠지만 파티마의 계시는 개별 사건에 관한 한 과거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합

니다. 이 비밀의 의미는 구원의 길인 기도를 권고하고 참회와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

다. 또 마리아의 순종("그대로 이루어지소서")으로 이 세상에 구세주가 오시고 역사가

바뀌었듯이, 하느님을 바라보는 깨끗한 마음으로 악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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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6일 가족들과 휴가 중에 보령에 있는 갈매못 성지를 찾아갔습니다. 
성지 기념관 입구 벽에 붙어 있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의 문구 한 줄에 큰 감동을 받고 가슴에 새겨두기 위해 찍어 둔 사진을 무보정으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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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북쪽으로 28Km,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위치한 한티는 깊은 산골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 군에 걸쳐져 있으며,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팔공 산괴의 주봉에서 가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과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고향땅을 떠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유교의 전통이 강하였던 영남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1801) 이후였다. 박해를 피해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이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상주 등으로 피난하여 신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잠시동안 외부와 격리된 이곳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앙정부의 관여 없이 지방관에 의한 국지적인 박해인 을해박해(1815)때에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등지의 많은 신자들이, 정해박해(1827)때에는 상주 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끝까지 배교(背敎)하지 않고 굶주림과 온갖 고문의 역경 중에도 옥사하지 않은 신자들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이때 대구 감영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과 형제들이 그들과의 연락과 옥바라지를 위해 감옥과 비교적 가깝고 안전하다고 판단한 이곳 한티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839년 4월 정해박해 때에 체포된 신자들이 처형되기 한 해 전인 1838년 김현상 요아킴 가정을 비롯한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1850년대 말에는 큰 신자촌이 되었다. 경신박해(1860)때에 한티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졌다가 박해가 끝나자 다시 모여들었다. 1862년 장 베르뇌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서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신박해로 김현상의 후손들이 대구로 떠난 후 조 가롤로 가정이 중심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 살던 김응진 가롤로(김현상의 차남) 가정과 성상돈 아우구스띠노 및 그 숙부 서익순과 노곡동 송씨 가정과 신나무골의 여러 신자들이 한티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그 해 봄 문경 한실 서태순 베드로가 잡혀 상주 감영에 끌려갔다가 12월 19일 순교하니 그 조카 서상돈이 그 시신을 한티에 안장하였다.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는 듯 하자 서익순과 이 알로이시오가 한티에서 대구로 내려가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절두산에서 백지사를 당하고 한강물에 던져져 순교한다.
1868년 음력 4월 17일에 독일인 옵페르트(Oppert)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을 내려 박해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1868년 봄 한티에 포졸들이 들어와 재판과정도 없이 배교하지 않는 조가롤로를 비롯한 30여명의 신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달아나는 신자들은 뒤따라가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포졸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현재 한티의 순교자 묘가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한편 당시의 공소 회장이었던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 아기의 시신은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었다. 그리하여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던 신자촌이며 또한 그들이 처형을 당한 순교지였을 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완전한 순교성지가 되었다.

1868년 박해의 칼날을 받은 한티 공소는 한줌의 재로 변한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마을에 살던 박만수 요셉은 살아남은 몇몇의 사람들을 모아 공소재건에 앞장선다. 먼저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순교자묘역 대형 십자가 뒤편)은 '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하여 바람맞이땅(현재의 초가집이 있는 곳)에 새로이 마을을 이룬다. 또한 당시 공소회장이던 조 가롤로의 아들 조영학 토마(당시 12세)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무렵 군위 칫솔에서 김재윤 플로리아노 가정과 김윤하 가정이 들어오고, 신나무골의 배순규 가정과 조규성 프란치스꼬 가정이 들어왔다.
1882-1883년 김보록 로베르또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이때 신자수 39명, 고백성사자 20명, 영성체자 19명, 세례자 3명 혼배자 1쌍이었다. 1885년 대구 본당이 설정되어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하게 되니, 김보록 신부도 한티에 자주 왔고, 한티 신자들은 대축일이면 신나무골로 미사참례하러 갔다. 이후 한티 공소는 새로이 번창하여 1900년 초에는 공소 신자수가 8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나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전교를 위해, 또한 생활이 불편한 이곳을 떠나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공소는 쇠퇴하게 되었다.

공소재건의 의의
첫째, 순교자의 시신을 묻어드리고 이주해 와서 살았다. 이는 순교자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다. 남은 것이 없는 곳에 성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여들었다.
둘째, 바람맞이 땅에 동네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속죄의 마음과 순교자를 따라 순교하겠다는 의지이다. 노출이 가장 심한 곳에 마을을 이룬다는 것은 죽음을 언제나 맞을 준비된 마음이다.
셋째, 조 가롤로 회장의 어린 아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회장으로 모셨다. 이것은 순교자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이며, 순교자들에 대한 예우였을 것이다.
 
한티 순교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순교자 묘의 대부분인 33기는 무명순교자의 묘지이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다음의 4기이다. 
조 가롤로는 상주의 구두실이 고향으로 그의 집안은 1839년이래 정권을 장악했던 풍양 조씨로, 그들은 1839년(기해박해)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박해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므로 문중이 얼마나 천주교인을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 가롤로가 천주교를 믿었으므로 그는 문중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친척들이 집을 불살라 버렸고 정든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은 3년 동안 충청도 황간과 상촌 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칠곡 한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숯을 굽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티로 피난 오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주일이면 신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 생활에 충실하던 그는 신자들을 지도하는 회장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티 부락에 열심한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서익순과 서태순 형제는 증조부 서광수 대(代)부터 하느님을 믿어온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충주 장원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강원도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1857년 상주에 도착한 이들은 2년간 살다가 1859년 장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살고 있는 대구로 왔다.1866년 경상도에서 전교하던 리델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대구에 와서 박해에 관한 소식을 전하자 신자들은 흩어져 피난을 갔는데, 서태순은 문경 한실로, 그의 형 서익순 가족과 서상돈 가족은 한티로 피난을 갔다. 서태순과 부인 김데레사와 7세된 남자아이는 1866년 문경에서 잡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조카 서상돈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오가면서 서태순의 옥바라지를 해 주었는데, 한번은 서태순이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옥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참혹한 광경에 이후 서상돈은 평생 쌀밥을 먹지 않았다 한다. 서태순 베드로가 1866년 12월 18일에 34세의 나이로 순교하자 그의 시신을 형 서익순이 한티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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