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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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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08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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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례
    /images/icon/dot1_gre3.gif 교회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
    /images/icon/dot1_gre3.gif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계속 수행하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드리는 공적 예배
    /images/icon/dot1_gre3.gif 교회가 성서나 성전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공인한 의식으로 개인의 신심생활과는 구별
    전례의 목적
    전례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거처가 되게 하고, 신자들을 굳세게 하며, 그리스도를 세상에 선포하게 하고 한 목자 아래 한 무리가 되게 함
    전례의 세 분야
    1.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희생제사인 미사
    2. 우리를 초자연적 생명에 참여케 하는 성사
    3. 교회가 매일 드리는 성무일도
    공적 예배인 전례를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서'와 '성사 예식서 '를 따라야 한다.
    전례의 일치와 참여
    일치된 전례행위 - 전세계에서 같은 날, 같은 형식, 같은 지향으로 하느님을 찬미함
    신자 각자는 전례를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례를 함께 행하는 것임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 말씀, 음악, 기도 - 우리의 마음을 하나되게 하고 뜨겁게 만들어 하늘 나라로 초대
    우리가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함은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요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누리는 것
    전례기도의 조건
    미사, 성사, 성무일도 등은 전례이고, 십자가의 길, 로사리오 기도, 기도회 등은 여러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지만 전례가 아니라 신심행위.
    전례기도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
    첫째, 교황청이 인준한 기도문 사용
    둘째, 교회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하며
    셋째, 정식으로 임명된 사람이 전례를 지도함.
    2. 전례주기(주년)
    /images/icon/dot1_gre3.gif 교회는 1년을 한 주기로 하여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념 즉, 재현함.
    /images/icon/dot1_gre3.gif 그리스도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시작되고 그의 부활로써 완성되기 때문에 전례주년도 성탄과 부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음
    /images/icon/dot1_gre3.gif 성탄은 부활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부활이 교회 전례의 정점
    /images/icon/dot1_gre3.gif 성탄 준비기간 - 4주간의 대림시기
    성탄시기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성가정,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주의공헌, 주의 세례, 주의 봉헌 축일을 수반하고 성탄을 위해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성모성탄, 성모영보,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축일, 성 요셉 축일, 성요한 세자 축일, 대천사 축일 등이 이어짐
    /images/icon/dot1_gre3.gif 부활 준비기간 - 40일간의 사순시기
    부활시기는 예수수난[성지], 빠스카의 3일과 계속되는 부활주일들, 승천,성령강림을 수반하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예수성심, 예수의 거룩한 변모, 성 십자가 현양, 그리스도왕 축일 등이 계속 됨.
    대림시기의 전례
    새해의 시작 : 대림 제 1주일 - 이 날부터 교회력[전례력]은 새해가 시작
    말씀의 전례는 3년을 한 주기로 편찬 - 1999년은 A해, 2000년은 B해, 2001년은 C해의 순서
    대림시기 동안에는 제대 주위의 화려함을 피하고 대영광송을 하지 않음.
    대림환 : 대림시기 동안 푸른 나뭇가지와 네 개의 초를 꽂아 만든 것으로써 구세주께서 어느 정도 가까이 오셨는지 알려 주어 마음의 준비를 갖추도록 매주 촛불을 하나씩 늘려 켬.
    성탄 전례
    성탄 대축일 미사 : 모든 사제는 미사를 세대 드릴 수 있는 특권, 미사경문도 세 가지
    첫째 미사 - 밤중에 드리는데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영원히 탄생하심을 경축함.
    둘째 미사 - 새벽에 드리는데, 성자께서 영원으로부터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사이에 육체를 가지고 성모 마리아 몸에서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나심을 경축.
    셋째 미사 - 낮에 드리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요, 구원자로 오심을 경축.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장엄하게 선포.
    성탄 8부 : 너무나 큰 축일이기에 성탄 후 8일간 성탄을 축하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새로 나신 예수님께 흠숭과 사랑을 드림..
    8부까지 축제를 지내는 축일은 부활 대축일과 성탄 대축일 뿐이다.
    성탄8부는 성 스테파노 축일(26일), 성 요한 사도 축일(27일),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28)일, 성 가정 축일(8부 내의 주일), 8부의 마지막 날(1일)인 천주의 모친 축일등 이미 정해져 내려오는 축일 때문에 축제의 의미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구유조배 : 예루살렘 신자들이 성탄 밤에 베들레헴 현지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을 부러워한 로마의 신자들이 5세기부터 마굿간 모형을 만들어 그 앞에서 성탄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1223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가 예루살렘 성지순례에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더 잘 인식시키기 위하여 짐승과 새들까지 구유 앞에 등장시켰고 이를 널리 보급시킴.
    성탄 밤 미사 전에 구유를 꾸며두고 말씀의 전례와 함께 예수 아기를 구유에 모시는 장엄한 행렬을 함. 행렬 후 새로 나신 예수 아기에게 조배를 드리고 새 삶을 다짐.
    성탄나무 : 상록수에 금실, 은실, 별 등으로 장식하여, 온갖 은총[금실, 은실]을 가지신 분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상록수]을 주시고 세상의 빛[별]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표현.
    주의 공현 전례
    삼왕래조 축일이라고도 하는 주의 공현 축일은 교회력의 가장 오래된 큰 축일이며 의무적 축일 - 한국에서는 1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냄[원래는 1월 6일].
    공현이란 말은 '나타남, 나타내어 보여줌'이란 뜻.
    옛부터 교회는 이 축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중 세 가지의 중요한 신비를 기념함으로써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심을 세상에 알린다.
    이 주간으로써 성탄시기가 끝남.
    사십일[사순]
    사순시기는 우리의 육체적 고신극기나 단식을 통한 참회의 생활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여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기
    40이라는 숫자는 성서에서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준비하는 기간, 정화하는 데 필요한 기간을 상징.
    사순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축일 전 6주간 중에서 주님의 축일인 주일을 뺀 40일간.
    /images/icon/dot1_gre3.gif
    6주간×7일 - 6일[주일] + 4일[재의 수요일까지 역산] = 40일
    재의 수요일
    사제는 지난 해 성지주일에 나누어 주었던 성지를 회수하여 재를 만들고, 이를 축성하여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창세 3, 19) 하며 자신과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다.
    재는 죽음을 상징하고, 재를 얹는 것은 방자했던 자신을 채찍질하여 낮추고 참되게 사는 방법을 찾도록 한다.
    이 날 단식과 금육을 지키고 극기, 금욕, 자선을 권장 -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기 위한 훈련.
    사순시기의 각 주간의 지향
    1. 세례 : 이 기간 동안 예비자 선발예식을 하고 성 토요일[부활성야]에 세례식을 하기 때문에 미사의 독서나 기도문은 세례를 주제로 함.
    2. 속죄 : 원래 사순시기 동안 죄를 범한 신자들이 공적으로 보속 - 희생. 기도, 자선
    3. 예수님의 수난 : 사순시기 초에는 예수님의 외적 수난 사건에 앞서 예수님이 어두움과 악의 세력과 투쟁하는 모습 → 사순 제 5주간부터는 예수님의 수난이 극대화하여 성주간에 절정.
    성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전 한 주간 - 예수님이 위대한 구원사업을 이룩하는 때요, 교회전례의 정점을 이루기 때문에 성주간이라 함.
    성주간은 예수수난[성지]주일부터 시작.
    성지주일에 사제는 성지[빨마가지]를 축성하여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루살렘[교회]의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다함께 '호산나'를 부르며 환영.
    말씀의 전례 때에는 수난사가 봉독.
    성 월요일 - 예수님의 죽음[장례]을 예고,
    성 화요일 - 제자들의 배반을 예고,
    성 수요일 -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실지 예고.

    이 3일 동안에 특별한 전례는 없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같다.
성 3 일
3 일은 성주간의 후반부 3일인데 주의 만찬으로 시작되고 부활 전야제로 절정을 이루며 부활주일 저녁기도로 끝난다.
성 목요일 전례
이 날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시면서 유언을 남기셨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으며, 제자 유다 이스가리옷의 배반으로 이교도들의 손에 붙잡히셨던 날.
성유 축성 미사 : 예수님이 당신 사제직을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주셨음을 기념.
이날 아침에 주교좌성당에서 주교와 사제단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성유를 축성 - 주교와 사제들의 일치가 표현, 사제들은 약속 갱신식을 거행.
성유는 사제들이 세례, 견진, 신품, 병자성사를 집행할 때 사용.
주의 만찬 미사 :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저녁식사로써 당신을 만인에게 성체성사로서 주심을 기념. "서로 사랑하라" (요한 13, 34)는 새 계명이 선포되는 미사.
강론 후에 세족례 - 예수님이 사도들의 발을 씻으면서 남기신 사랑의 계명을 상기시켜 서로 봉사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뜻을 가르치는 예식.
영성체 후 성체를 본 감실에 모시지 않고 비워둔 채 현양제대에 모시고 제대를 벗김 - 예수께서 3일 동안 땅에 묻혀 계셨음을 드러냄.
영성체 후 기도를 마친 다음 사제는 성체를 현양제대에 모시고 분향 - 성금요일 수난예절까지 신자들은 성체조배 함. 이것은 올리브산에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시기까지 기도와 번민으로 고통당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함.
현양제대로 성체가 옮겨질 때부터 성 금요일 십자가 경배예절에서 십자가를 벗길 때까지 십자가를 가리워둠.
성 금요일 전례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길'을 따라 죽음의 산 골고타로 오르셨고, 십자가상에서 희생제물로서 죽으신 날.
교회가 미사를 드리지 않는 유일한 날. 다른 성사도 집행하지 않음.
수난예식 : 예수님이 운명하신 오후 3시경에 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목상의 이유로 더 늦은 시간에도 거행.
십자가 경배예식 :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십자가는 구원과 생명의 나무이며 계속 세상을 새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
영성체를 위하여 본 제대로 성체가 옮겨지고 남은 성체는 별실에 모셔둔다.
성 토요일 전례 (부활성야)
사순시기 마지막을 장식하는 성 토요일 밤의 전례는 모든 전례의 극치.
이 날은 교회가 주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날 - 제대도 벗겨진 채 그대로 있고 미사도 드리지 아니한다.
이 밤은 주께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참 삶으로 건너가심[빠스카]을 기억하는 밤 - 우리가 죄의 속박에서 자유로, 죄의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의 죽음에서 영생[부활]으로 건너감을 체험하는 밤.
빛의 예식 : 불과 부활초를 축성하고 불의 행렬을 한다. 부활로써 어둠의 권세를 몰아내고 세상에 나타나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린다는 뜻에서 이 예식을 거행.
말씀의 전례 : 일곱 개의 독서와 일곱 개의 층계송을 노래한 후 대영광송을 장엄하게 노래로 시작. 풍금과 종을 다시 치고 이때부터 영광송을 하게 된다.
세례 예식 : 세례수 축성과 세례식 후 모두가 촛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며 영세자와 함께 세례서약을 갱신.
부활 전례
부활 축일 결정 : 부활 대축일은 유다인들의 과월절[빠스카] 축제에서 유래하므로 유다인들의 월력으로 니산(Nisan)달 14일에 지냈으나 지금은 춘분이 지난후 만월 다음에 오는 첫 주일에 지낸다.
부활초 : 부활초는 부활성야에 축성하며 성령강림까지 제대 옆에 두고 전례를 거행하는 동안 불을 켠다.
부활초는 에집트에서 탈출하는 이스라엘을 비추며 앞장 서서 인도하던 불기둥(출애 13, 21;14, 24 참고)을 상징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신다는 표지.
촛불은 초가 탈 때 사랑의 불로 작열하고 어둠을 몰아 내는 빛이 되어 영광스럽게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본성과 내적 모습을 나타냄.
부활초에는 구원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상징하기 위하여 희랍문자의 첫 글자인 A와 끝 글자인 Ω를 새기고 그 해의 수자를 새겨 넣음.
부활 삼종기도 : '부활의 날'인 주일과 부활시기에는 삼종기도를 할 때 서서 함 - 서 있는 자세는 살아 있는 인간의 자세, 기쁨의 자세, 승리자의 자세.
부활 8부 축제 : 부활의 기쁨을 하루에 끝내지 못하고 부활시기의 첫 8일 동안을 주님의 대축일로 지냄.
부활 축일이 신앙의 근본 축일이므로 12세기부터 8부로 끝내지 않고 성령강림까지 7주간을 축제기간으로 지내기 시작하였음.
8부의 전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망애 삼덕으로 우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을 나타냄.
부활 달걀 : 부활 대축일에 달걀에 그림이나 글씨 혹은 기호를 새겨 선물.
옛부터 달걀은 봄 혹은 생명의 상징. 중세에는 사순절 동안 달걀을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부활주일에 달걀을 주고 받는 관습으로 바뀜.
부활 행렬 : 부활주일 미사후 선두에 꽃으로 장식된 십자고상이나 부활초를 앞세우고 노래와 기도를 하면서 행렬 -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 기쁨을 세상에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임을 경축.
예수승천 대축일
승천은 예수님과 우리, 우리와 하느님 나라와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주는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과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한 사건.
예수님은 승천으로써 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그분은 영광을 입으시고 모든 시간과 공간에 자리하시게 되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고 약속하셨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존을 일시 거두셨지만, 신앙인의 마음속과 기도하는 교회 안에 현존하시며, 특히 성체성사로서 현존하신다.
원래 승천 축일은 부활 후 제 40일[성령강림 10일 전]에 지냈음.
승천 축일 후 9일 동안 성령을 기다리면서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 - 여기서 '9일 기도'라는 말이 나오고 어떤 특별한 은총을 구하기 위해서 9일 기도를 하는 관례가 생김.
성령강림 대축일
불혀 모양으로 강림한 성령은 사도들의 지혜를 밝혀주고 마음을 뜨겁게 해주며 여러 가지 언어를 하는 능력으로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뭉쳐 나가기 시작했다(사도 2, 1-47).
성령은 부활한 예수님의 영이요, 그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분이며, 우리의 위로자[협조자]와 보호자로 오신 분.
성령께서는 전례 안에 활동하시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전례행위를 그리스도의 행위가 되게 하심. 이 날 특별히 미사 중에 '성령송가'를 바침.
연중시기
부활시기는 성령강림으로 일단 막을 내리고, 하늘 나라를 묵상하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긴 준비기간인 연중시기가 시작.
성령강림 후 첫 주일 - 그리스도의 구원업적으로 더욱 뚜렷이 드러난 삼위일체 대축일.
그 다음 주일 -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성 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세워주셨지만 죽음이 임박한 상황이라 복된 성사 안에 우리 주께서 현존하여 우리와 함께 계심을 경축할 여유가 없었음.
그 다음 금요일 - 예수성심 대축일, 성 금요일의 신비 중의 하나인 창에 찔리신 예수성심을 기념.
예수성심 대축일 다음부터 대림시기까지는 그리스도 신비의 특수한 면을 경축하기 보다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경축.
긴 연중시기가 계속되다가 11월 1일에 성령의 인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른 모든 성인 성녀들을 기념하는 '모든 성인의 날'을 맞음 - 종말이 가까이 왔으니 정신차려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라는 가르침.
그 다음 날 - '위령의 날'. 우리의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이니 하늘 나라에서 모두 반가이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
연중 마지막 주일 - '그리스도왕 대축일'. 그리스도는 세말에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오실 왕이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최고의 흠숭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연중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축일로 정함.
주일 : 일요일이 시작될 때 무덤에서 영광스럽게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분은 바로 우리를 위한 빛이요, 생명이요, 기쁨이 되었고, 죽음과 암흑을 없애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 주었으므로 일요일을 주님의 날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 주일을 거룩하게 경축하는 것이 전례생활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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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07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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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느님 나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여러분은 회개(悔改)하고 복음(福音)을 믿으시오" (마르 1, 15).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核心)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 있으며, 이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에 대해 여러가지 비유와 기적 그리고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심으로 깨닫게 해준다.
    당시의 유다인들의 사고에는 어떤 의로운 지배자를 그리워했으며 언젠가는 이 이상이 실현되리라 희망하여 왔다. 당시의 유다인들의 희망(希望)을 총괄하는 개념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의지할 데 없고 무력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받고 도움을 받으며, 불의한 지배로부터 해방(解放)되는 기쁨과 평화(平和)가 넘치는 곳이리라 희망하였다. 이를 위해 아주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며, 이 새로운 시작은 생명과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 새로움, 지금까지 있어본 적이 없는 것, 상상을 초월하는 것, 연역적으로 불가능한 것, 더구나 조작될 수 없는 것, 그러기에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 결국 '하느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느님의 하느님이심, 그 분의 주님이심을 뜻하며,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인간임과 세상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하느님의 다스림'은 창조 질서에 적대적인 악의 권세로부터의 해방(解放), 구원(救援)받을 길이 없을 만큼 서로 찢겨져 있는 실재 상호 간의 화해(和解)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느님 나라의 비유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 역사 체험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에집트를 탈출할 때 놀라운 기적으로 당신 백성들을 건져내셨으며(출애 13,17-15,21)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에서도 줄곧 당신 자신을 섭리의 하느님, 길을 이끄시는 하느님으로 드러내셨다(출애 16-40).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에 이웃 나라와 많은 충돌을 하며 줄곧 쓰라린 체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작가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신앙을 명백히 종말론화(終末論化)하기 시작한다. 이 '작가 예언자들'은 과거의 출애굽이나 하느님과의 계약 체결과 같은 과거의 모든 위대한 구원위업(救援偉業)들이 미래에 가서는 더욱 거창하게 재현되리라고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새로운 계약', 어떤 '새로운 출애굽'을 희망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종말론적 희망(終末論的 希望)은 장차 일어날 사건 보도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 희망은 오히려 어떤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의 위로(慰勞)와 희망(希望)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결국 이 세상의 지배자로 오셔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키리라는 신앙(信仰)의 확신(確信)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상태에서 새롭고도 결정적인 희망(希望)을 제시하였다. 예수님은 이 종말론적 희망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마르 1, 15).
    수많은 세대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지금 다 되었다고 선포하신다.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되도다! 사실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많은 예언자들과 임금들이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여러분이 듣는 것을 들으려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루가 10,23-24).
    예언자들이 선포하던 그 때가 다 된 것이다.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해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마르 4, 26-29).
    또 비유로 말씀하신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된다"(마르 4, 30-32).
    또 하느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신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비슷한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 33).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것이 가장 작은 것 안에 숨겨져 있고, 그 작은 것 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은 가장 작은 것 안에 숨어있음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나의 감추어진 현실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현재 안에 바로 지금 이 자리에(Here and Now)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이 바로 이 세상 한 가운데로 몰래 뚫고 들어 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3. 하느님 나라의 완성
    우리가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매우 막막하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로서 사회의 개혁 같은 엄청난 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정과 학교, 직장과 사회 속에 살면서 그 생활 양식을 전수받았다. 우리는 독이나 약 모두를 이 사회와 함께 마시고 살아간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얼마나 미약하고 무력한 존재인가를 통감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시험지옥과 같은 입시 제도를 반대하면서도 자기 자식만은 될 수 있으면 좋은 학교에 보내려 한다. 소비 사회의 낭비를 반대하지만 상점에서 상품 하나를 사는 일 자체가 그러한 사회 구조에 가담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이렇듯이 우리는 마치 큰 바다에 떠 다니는 해초와도 같이 사회의 가치관에 휩쓸려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는 바위에다 계란을 내리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는 무에서 천지를 창조(Creatio ex Nihilo)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즉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의 노력이 아무리 보잘 것 없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협력을 요구하시며 마침내 는 이 세상을 모두 포괄하는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킬 것임을 믿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하느님 만이 하실 수 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Already) 이 세상에 도래하였지만 '아직 아니'(Not Yet)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이렇듯이 완성의 도정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맛들이고 거기에 동참하는 생활이어야 하겠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멋진 삶에 눈을 뜬 사람은 이 세상이 보장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마태오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을 보자.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지 숨겨 두고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산다. 또한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장사꾼과 비슷하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물러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4. 하느님 나라를 위한 협력자의 생활양식
    예수님의 진복선언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 5장은 이 진복선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5장부터 7장까지의 말씀을 예수님의 산상설교라고 한다. 여기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생활 양식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산상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으로써 제시되는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 마태오복음 5장 38절에서 39절, 43절에서 45절까지의 말씀을 보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하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들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오히려 누가 당신의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편을 돌려대시오....'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하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들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계명은 참으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듯이 보인다. 이러한 새로운 생활 양식은 교회 안에서 공동체적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규칙과 계명처럼 억지로 사랑해야겠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하려고 애를 써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한계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우리가 죄많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 하느님은 이러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로서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온 몸으로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생활 양식과 타인에 대한 관계 양식이 변화될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생활양식이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이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할 때 틀림없이 이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데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지금 교회 안에서 어떠한 체험을 하고 어떠한 생활 양식을 이루고 있는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각자 반성해 보도록 해야겠다. 우리가 변화될 때 교회가 변화되고 마침내 세상이 변화될 것임을 굳게 믿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하느님 나라를 전해야 할 사명
    우리 모두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어두움과 악의 세력이 만연하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가난한 사람들, 즉 우리에게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모른다. 경제성장과 번영, 능률을 최대의 가치로 삼는 사회, 너무도 시끄럽고 분주하게 우리를 일로 몰아 붙여서 생각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더욱 빼앗아 가는 사회, 자기의 이익과 성공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고 이에 필요없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말살시키려는 사회, 이런 사회 속에서 하느님 나라와 그 의(義)를 찾아가는 것, 자기의 이해와 관계없이 참으로 사랑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설령 지금은 눈에 띄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통해서 세상이 변혁되어 간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이 하느님 사랑의 도구로써 활동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 스스로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위해 살다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를 관철시키셨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 역시 우리의 삶과 죽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증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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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06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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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
금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이 위태롭게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살아 계시던 때 이스라엘의 기성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의 기성 지도자들은 시골의 한 예언자가 놀라운 기적을 하면서 백성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보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처음 얼마 동안은 중풍병자나 나병 등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 고작인 줄 알고 안심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신의 병자들을 고치는데 그치지 않았다. 예수님은 마음이 병든 사람들도 고쳐 주셨다. 그것도 병든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당신이 몸소 찾아가서 그들의 병을 보살펴 주셨다. 또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소외받고 핍박받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아졌다. 갈릴레아 호수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겨우 수십명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많은 병자들을 치유시켰고 그때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마침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 오셨을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지자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기성 지도자들은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의 지배를 따르면 그만이었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쫓아내고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니 그 불안은 더 커졌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이렇게 하는 권한이 있는지를 따지기 시작한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는 일들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력으로 예수님을 묵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찌기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의 예고에 따라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고 있음을 말한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행한 박해는 처음부터 고의적이고 무지막지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을 다 듣고 나서 백성들이 보고 있는 데서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한 대답이나 부활논쟁(루가 20.20-40)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답변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트집을 잡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백성들이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고 또한 겉꾸며 길게 기도하는 사람들'이니 조심하라고 말씀하셨고 이런 사람들은 더욱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주의를 주셨던 것이다(루가 20,45-47). 유대 지도자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트집을 잡지도 못하고 망신을 당하자 예수님을 미워한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율법의 적용을 무색하게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질투하였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한낱 시골의 예언자로만 보지 않고 자기들의 경쟁자로 보고 그분의 말씀과 행동들을 조사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트집잡을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예수님을 백성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율법을 안 지킨 때가 여러 번 있는 예수님은 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었다. 그때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분통을 터트렸다. 그들은 분통을 터트리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이 가져다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율법학자들의 말보다 더 좋아하면서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초기의 예수님 행적을 멀리 시골에서 있었던 일들로 치부하면서 그들은 되도록 예수님에 관한 것을 모르는 체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지금까지는 아무도 넘겨다 보지 않았던 율법학자들의 권위에 예수님이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어서 그들은 예수님을 증오하게 되었다. 곧 그들은 자기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마치 그들의 계획을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바로 이때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그들을 만난다. 이 만남으로 예수님은 며칠 후에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잡히게 되었다.
2.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묻히심
이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과월절이 되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예루살렘의 어느 집 이층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것이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다(루가 22.14-20).
과월절의 본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탈출할 때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 옛날의 조상들이 종살이 하던 것을 구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에는 조상들이 고생하던 때를 생각하여 쓴 풀과 누룩없는 빵 그리고 속죄의 의미로 양을 잡아서 그 고기를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이러한 유대인의 전통적인 예절과는 다르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빵을 드시고는 "이는 여러분을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하셨다.
또 잔을 드시고는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 여러분을 위하여 쏟는 것이다" 하셨다. 그런 후에 당신이 한 제자의 배반에 의해서 곧 잡히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는 고통스러운 말이었다. 그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게 되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전에도 하느님의 복음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괴로워 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려 들지 않는 백성들을 보시고 무서운 예언을 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셨다(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저주하심 - 루가 10,13-15.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심 - 루가 19,41-44).
아무튼 이때의 예수님은 착잡한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시고 싶었던 말씀을 하셨다. 즉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 하느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협조자로 성령을 보내겠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맡긴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언을 제자들에게 하신 후에 그 방을 나와서 전에 갔던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그곳에 있는 게세마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떨어져서 혼자서 기도하신다. 이 기도를 하는 동안 예수님은 온갖 인간적인 고통과 번민을 느끼신다. 사람이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즉 아무리 중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살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하고자 한다. 바로 그런 나약한 인간의 심경으로 예수님은 하느님께 간구한다. 즉 "아버지,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신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지만 예수님은 다가오는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다가오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 후에 다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신다. 얼마 있지 않아서 깜깜한 밤 중인데도 유다가 성전 관리병들과 함께 올리브산에 와서 예수님을 체포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서는 대제관의 집으로 갔다. 베드로는 스승이 붙잡혀 가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겁이 나서 도망쳤지만 이내 스승이 걱정되어서 먼발치에서 예수님을 따라 대제관의 집에까지 갔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추궁으로 베드로는 또 겁이 나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이때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이곳에 없었다.
한편 대제관의 집에 있던 사람들은 잡혀온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독하면서 때렸다.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은 최고의회라는 것을 열어서 그곳에 예수님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를 증명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들이 내놓은 증거나 증인들이 하는 말은 어느 것도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어떻게 해도 그런 죄목은 예수님에게 맞지 않자 그들은 끝에 가서 억지를 부린다.
즉 "그러니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대제관이 이 말을 한 것은 당시 유대인의 관습대로라면 누구든 '하느님'이라는 말조차도 함부로 말해서는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님처럼 시골 예언자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그들에게는 당연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알고 계시지만 예수님은 "내가 '그'라고 여러분은 말한다"하고 대답하신다. 그러자 그들은 이 말씀을 갖고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단정을 내린다.
다음날 대제관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유대인에게는 사형 권한이 없음을 이유로 하여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넘겨준다.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흔히 볼 수 있는 군인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대제관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표면적인 죄목은 '유대민족을 이간하여 황제에게 세금내는 것을 막고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고 말한 점'이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는 별도로 예수님을 심문해 보고는 대제관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위험 인물이 아니라고 보았다. 빌라도 조차도 대제관들이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알고서 이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예수님을 또 다른 사람, 헤로데에게 넘겨준다. 헤로데라는 사람은 로마 총독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에 불과한 유대인의 왕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로마의 총독이 허가하지 않는 일은 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아무런 권한이 없었던 헤로데이기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건네 받았지만 별다른 심문은 하지 않고 그저 장난이나 치고는 다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빌라도는 짜증이 나서 축제 때마다 유대인 죄인 하나를 풀어주었던 것을 생각해 내고는 예수님을 매질이나 해서 풀어 주려고 한다. 그러나 대제관들은 빌라도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예수님은 죽이고 그대신 바라빠라는 죄인을 풀어 달라고 한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요구한 예수님의 사형은 그저 단순히 칼로 목을 자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요구한 사형의 방법은 그 시대에 가장 흉악한 죄인들에게만 언도하였던 '십자가 형'이었다. 이 형을 받은 죄인은 자기가 매달리게 될 십자가를 들고 형장으로 가기 전에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시를 돌았다. 로마의 총독은 자기들에게 반항한 죄인들에게 이런 가혹한 형벌을 주었다.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보고 로마에 반항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죄인이 사형장에 도착하는 동안 이제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조롱과 모욕을 모든 사람들에게 받았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보고 침을 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욕을 하는 사람도 있고 저주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욕설은 듣기만 해도 보통은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세 번이나 쓰러졌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꾀를 부린다고 조롱하며 오히려 예수님을 때린다. 그 험한 길을 걸어 오는 동안 예수님을 도와 준 사람은 키레네 사람 시몬 뿐이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당신이 죽어야 할 장소인 '해골산(골고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군인들은 피와 땀이 범벅이 된 예수님의 옷을 벗기우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눕게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눕자 그들은 예수님의 양 손목과 발등 위에 커다란 못을 들고 주저없이 박았다. 그리고 십자가를 들자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은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 대제관들의 시기심에 의해서 예수님은 억울하게 잡혀와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게 되었다. 즉 예수님 때문에 백성들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대제관들은 질투심을 못 이겨서 예수님에게 잔악한 보복을 한 것이다. 본시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작은 명패를 달았다.
I.N.R.I.(Jesus Nazarenus Rex Judaeorum) 곧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것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죄명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명패는 유대 지도자들의 보복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보인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시면서 서서히 죽으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무도 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또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하고 하실 뿐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자 아무도 그분을 거두어서 무덤에 묻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선 대제관들이 그것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이라는 사람도 자신이 당당한 의회의원이면서도 조심스럽게 빌라도에게 가서 허가를 받아서 자기가 아는 빈무덤에 예수님을 묻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는 가운데 쓸쓸히 돌아가셨다. 단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십자가 아래서 지켜본 사람은 성모 마리아와 몇 사람의 여자들, 그리고 제자로는 유일하게 요한 뿐이었다. 이들은 안식일 전날에 예수님이 빈무덤에 묻히시는 것을 지켜 보았다.
3. 예수님의 부활
그 여인들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와 향료를 발라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욕심이고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저 조용히 지냈다. 그 여자들은 안식일 이튿날 아침 일찍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 갔다. 여자들은 무덤에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 당연히 있어야 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덤에 있었던 어떤 사람이 실의에 빠진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준다. 즉 "왜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전에 갈릴레아 계셨을 때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시오.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여자들은 사람들이 무서워 숨어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대로 알려 주었다. 여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도 깜짝 놀라서 무덤에 와 보기는 하였지만 아직 믿지는 않았다. 얼마 후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셨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전에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4. 예수님의 수난, 고통, 죽음 그리고 부활의 구원적 의미
가톨릭 교회에서는 특히 성삼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한다. 즉 성목요일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을, 성금요일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성토요일에는 부활하심을 기념한다.
가톨릭의 십자가는 개신교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이 달려 계시며 몸에 오상이 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십자고상'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처럼 처참한 죽음을 하셨을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멸망될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체험과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이룩하신 업적의 가장 중대한 측면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한 구원에 대한 개념을 갖고 예수님의 행동을 살펴보자. 예수님은 당신이 받은 소명을 충실하게 실천하셨다. 즉 가난한 사람과 소외받은 사람들을 찾아 가서 위로하셨고 억눌리고 천대받던 세리와 창녀들을 따뜻하게 대하여 인간다운 해방을 주었다. 그리고 과부와 병든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행동에서 잘못된 곳을 찾아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런 곳은 도무지 보이질 않다. 오히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에게 불안과 불행으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준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구원 사업은 인간의 육체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보다 인간의 정신적인 면의 구원에 더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음하여 잡힌 여인의 통회하는 모습을 보시고 용서하심으로서 그녀를 구원하셨다(루가 7,48 -50). 또한 통회하고 뉘우치는 자캐오의 가정에 구원을 내리셨다(루가 19,9).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런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구원은 주어진다. 다시 말하면 먼저 자기의 잘못을 알고 뉘우친 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수난과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도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한 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구원은 어찌보면 모순된 말씀으로 제시되었다. 즉 스스로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자기 목숨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될 것이다(마태 19,39; 루가 9,24; 요한 12,25).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신 후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실제로 지옥의 저 아래에까지 내려 가셨다가 다시 그 죽음의 힘을 물리치고 부활하셨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 중에서 첫째로 태어나신 분"으로서(사도 26,23; 골로 1,18) 구원된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첫번째로 들어가신 분이시다. 그분은 "영광의 주님"으로서(1고린 2,8)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주인이시고(사도 3,6-8 참조) 하느님의 능력을 띤 강자이신다. 이렇게 부활이란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그것은 환생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며 신앙의 대상이다. 이 부활이 있었기에 사도들은 신앙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초이며 부활이 주는 기쁨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기쁨보다도, 가장 순수하고 최고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구약의 빠스카와 비교될 수 있다. 본래 빠스카라는 의미는 '거르고 지나가다'이다.
구약에 보면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구하기 위해서 모든 생물의 첫째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집 대문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칠했는데 그것은 생명의 구원을 약속하는 표시였다. 곧 죽음의 천사는 그 표시가 있으면 거르고 다음으로 건너 갔던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도움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죽지 않고 파라오의 종살이라는 속박에서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다.
이처럼 구약에서 양의 피가 지녔던 것을 신약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그대로 실천하셨다. 어떠한 잘못이나 흠집이 없는 순결한 양이 죽임을 당하여 그 피를 이스라엘 백성이 보게 됨으로써, 또 천사가 보게 됨으로써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고 나아가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해방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이 순수하고 온화한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여 그 처참한 몰골을 우리들에게 보이심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단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의 시기심이나 질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나의 이웃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죄의 종살이를 해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우리가 매일 범하는 시기심과 질투심이라는 죄악 때문에 당신이 빠스카의 제물인 어린 양처럼 산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그대로 하셨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되는 산 제물의 봉헌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죄의 종살이에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해방되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이렇게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이 세우신 성체성사는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시는 약속의 재현이며 그것의 실현이다.
이것은 매주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회상하고 성찬 중에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러한 빠스카의 의미를 매일의 미사 중에 성체성사 안에서 늘 새롭게 재현한다. 빠스카의 신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에서 죽고 또 부활하여 예수님과 만남으로서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뿐 아니라 내세까지 포함하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5.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니는 구원의 의미
성서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유언하신 것처럼 복음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이러한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들은 자캐오가 한 것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거나 바리사이들처럼 거절하여서 멸망에 빠지거나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주저없이 복음을 받아들였으므로 구원을 선택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생활에서 노력해야 한다.
우선 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또 가까운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생활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겠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때 그 용서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을 받게 된다. 구원이 매일 매일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이러한 통회와 신앙의 고백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빠스카의 신비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즉 진정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하여야겠다. 또한 축성된 성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나아가서 생활의 나눔을 통해서 나의 이웃과 일치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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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