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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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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1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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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삶의 공동체적(共同體的) 성격
우리 속담을 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은 없다"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인간이면 누구나 날 때부터, 어느 한 집단이나 단체에 속할 수밖에 없는 인간본성을 잘 보여주는 일례라 생각된다.
실제로 인간은 스스로 결단하고 그 결단에 대한 책임성 있는 행위로써, 한 집단이나 공동체에 속하려는 열망을 갖고 그곳에 개인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이상(理想)과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고자 한다.
그런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이나 욕구가 공동체의 그것과 맞지 않을 때, 그로부터의 알력이나 긴장이 나타나기 때문에 독립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면 누구나 한편으로 집단이나 단체에 속하기를 열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독립하려는 양면성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집단이나 단체에 속하려는 열망이 이탈하려는 열망보다 강한 듯하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체계화된 사회에서는 협력과 봉사를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가고 삶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절실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집단"이나 "단체"라는 표현보다는 "공동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어떠한 공동체를 막론하고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특성이 있다.
먼저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요소로서, 신념의 하나됨과 그 목적의 일치, 그리고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방편을 쓰겠다는 의견의 일치가 그것이다. 즉, 가급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하다면 짧은 시간 안에 자기들이 믿는 것을 전달하여 공동체로서 커져야겠다는 목적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의 일치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단순히 공생(共生) 그 자체로서의 공동체가 아니라, 어떤 신념의 일치에서 나온 귀결로서, "같이 나누는 삶"이라는 성격을 띄는 공동체를 말한다.
공동체의 또 다른 특성으로는 자신들이 맡은 것과 그 맡은 것에 대하여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이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통념을 "교회"에 적용시켜 말할 수 있을까? 답변은 다양할 것이다. 이는 교회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교회의 본질에 관하여
1) "교회"의 어원과 그 유래
우선 '교회'(Ecclesia)라는 어원에 대하여 보자. 이 단어는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적인 개념이 아니었다가 점차 성서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적인 용어가 된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원래 희랍어인 이 단어는 정치적인 의미로서 '민족 집합체'를 의미했다. 이 단어를 2세기에 라틴어 성서(70인역)로 번역하면서, 어의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Contio' 혹은 'Comitio'(정치적 집단으로서의 '집회')로 쓰지 않고, '유대인의 회당'(Syagogue), '예식단체', '하느님 백성의 전체 공동체'라는 의미로 도입함으로써 아직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날까지도 통용되는 영어의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공번된', '보편적인'을 뜻하는 'Catholicus'에서 나온 표현으로서, 어떤 특수한 민족이나 지역에만 해당되지 않고 모든 민족과 지역을 망라하여 "모든 것을 포용하는 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는 단지 개인적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다. "교회"라는 의미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상의 표현이며 동시에 공동체로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적인 결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공동체이며,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의 공동생활의 실천과 관계있는 것으로서 온 인류의 안녕과 기원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 - 지상 생애 동안의 예수
예수는 마르꼬 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1,15)라는, 간결한 말씀으로 자신의 원의가 무엇인지를 요약하고 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설교와 그의 공적인 활동을 통한 본래의 임무는 "하느님 나라"로서, 이 단어는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개념이 지니는 본래 의미와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와 관련해서 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열 두 사도의 선발(마르 3,13; 6.7-13)을 통해서도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예수는 선발된 열 두 사도로 하여금 그 자신이 행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세력을 나타내는 징표로, 악신을 몰아내게 하는 힘과 함께 병자들을 치유하는 능력을 준다. 열두 제자의 선발은 예수의 이스라엘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암시한다. 예수는 이 열 둘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고자 하며 길 잃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것이다.
한편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개념을 민족 복고주의적인 면모로서 만이 아니라,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유대 민족으로부터 이 개념을 정화하였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 8,11의 이방인들을 상대로 행한 제자들의 선교활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데에 있다. 즉,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의 구원행위 속에서, 그의 구마 행위와 병자치유 속에서, 지금 이미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다스림은 구체적인 한 백성을 관통하게 되며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은 "하느님 나라"와 확고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항상 하나의 백성을 전제로 하고 이 백성을 통해서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가운데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여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뒤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가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되면서부터 예수와 함께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해야 할 소임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가 선포하고 구현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고 그 내용은 무엇인지 대강 윤곽이 잡힌 셈이다. 성서학자들이 원칙적인 관점에 일치하고 있는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수 설교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는 완전히 현실화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가까이 왔다"는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통치"를 말한다.
둘째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신이 최고의 주권을 행사하는 완전히 자유롭고 충만한 최고의 권능행사를 의미한다. 그렇게 때문에 하느님이 그곳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를 약속하시며, 인간은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하느님 나라"는 지상적인 현세의 민족적 신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충실성, 즉 하느님과 타인들과의 친교에 그 참 뜻이 있는 순수한 종교적 다스림이다.
넷째로, "하느님 나라"는 만민에게 희소식을 전하는 "복음"이며 그 조건이 되는 것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나라"는 어떤 도덕적 법 규정에로의 요청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배와 현세의 지배 중에서 택일해야 하는 요구, 즉 "하느님을 향한 회개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3) "하느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 -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자기이해
(1) 하느님 백성
예수가 십자가 형에 처형되고 부활한 이후에,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여기서부터 구체적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30-100년)는 일차적으로 부활사건이 발생했던 갈릴레아 지역에서가 아니라 수도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인 계시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 그곳에서 경이적인 성령을 체험하였으며 이로부터 모두가 하느님께 사로 잡히고 공동체 상호간에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예수가 선포하고 구현한, "하느님 나라"와의 연관성하에서 자신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열 두 지파와 관계있는 사고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였을 때는, 열 두 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와 벤자민 지파 그리고 레위 지파의 절반만이 존재할 뿐, 더 이상 열 두 지파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시기에 열 두 부족이 완전히 재건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여기서 열 두 제자와 같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로의 초청에 응답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봉사하는 협력자들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는데 있어서의 조력자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적으로 예수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또 하나의 기능이 이들 공동체에 추가되기에 이른다 . 즉, 그들에게 본래 전 이스라엘에서 발생해야만 하는 이들,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전적인 헌신, 새로운 생활 질서에로의 회개, 형제·자매적 공동체에로의 모임 등의 일을 표징적으로 드러내야 할 사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제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종말론적이며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세계의 일반적 사회질서 속에서 타당성을 인정받고 통용되는 지배구조를 배격하고 상이한 유형의 공동체 구조를 구성해야 하는 소명을 받기에 이른다.
(2) 그리스도의 몸
사도 성 바울로의 서간에서 주로 발견되는 이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체 일원간에 일치의 근본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먼저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모든 사람이 한 몸이 되었음을 말하 고 있고(갈라 3,23-28), 창녀와의 결합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대조시키면서, 공동체 일원이 그의 몸과 합일되는 지체임을 말하고 있다(1고린 6,15- 17).
한편 바울로 사도는 이 개념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머리이며 세속적인 원리를 벗어버린 그리스도인은 그의 부르심을 받아서 한 몸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구절들을 보면,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와 공동체와의 관계로 보고 있으며 공동체가 사회적 집단으로서 보다는 구원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천상적 실재로서, 이 안에서 공동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동체와 그리스도는 "몸"으로 볼 때에, 서로 구별 지을 수 없는 상호관계가 성립되고(에페 1,22-23; 골로 1,18), 그리스도는 공동체가 그리로 향해 나아가는 원천과 목표이며(에페 4,15-16), 그리스도는 몸을 지배하는 머리 역할을 하는 가운데 공동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몸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예배와 하느님 말씀의 선포, 공동체 상호간에 교제하는 일,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
-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 양식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으므로(사도 21,20), 교회의 초기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되었다. 즉, 어린이들은 할례를 받고 경신례의 규범을 지키면서 안식일을 쉬는 날로 지켰고, 성전에서 모여 매일 암송하는 기도에 참석하였다(사도 2,4-6; 3,1; 5,21).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 그들 자신의 생활을 가진 공동체를 형성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성령이 드러나는, 하느님이 거주하시는 새로운 "성전"(1베드 2,5)으로서, 새롭고
독특한 나름내로의 형태를 지니면서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생활구조를 갖고 살았다.
(1) 예배와 하느님 말씀의 선포
사도행전에 의하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안식일에 공동기도에 참석한 다음(20,7), 개인 집에서 그들만의 집회를 가졌음을 전하고 있다(2,46; 12,12; 16,40; 20,8). 그리고 다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2,42)고 한다.
집회는 흔히 훈시와 예절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훈시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세례 전 예비신자 교리교육과,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한 강론이 있었다. 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메시아성을 강조하는 것이었고(2,23-26), 그 외에도 신앙과 애덕실천을 위한 훈계(14,22; 16,3) 혹은 용서, 그리고 좀더 친밀한 담화를 담은 권고 및 윤리교육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주로 사도들이 맡았다.
그리고 예절부분은 친교, 빵을 나눔, 기도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부유한 구성원들은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가난한 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러한 실천은 교육정도, 지방, 신분이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동체 정신을 강화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거리감과 여기에 따라오는 상호간의 장벽을 예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서, 후에 "성찬례"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것을 집전하는 사람이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빵과 포도주 위에 손을 펴들고 "최후의 만찬"에서 하셨던 예수의 말씀(1고린 11,23-26)을 빌어 축복하였다는 데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예식을 통해서 그들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지고의 사랑을 기억하게 되고,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게 됨으로써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일원은, 이를 통해서 한데 뭉치고 그리스도의 근본에 공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신강림으로 인하여 그들 안에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이후에 계속되는 복음선포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되었고, 이러한 진술의 내용은 곧 복음선포의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사도들은 하느님의 업적인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 목격자로 자처하면서(사도 2,32; 3,1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그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증거하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종말에 하느님의 계획을 완수하기 위하여 재림하므로, 그동안에 인간의 응답으로서 개인의 속죄와 용서, 그리고 세례를 제시하였다.
또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일원들은 사도들이 제시한 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에서도 산상설교(마태 5 - 7 장)의 여덟가지 행복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율법 완성, 용서와 간음, 이혼과 거짓 맹세에 관한 금령과 보복에 대한 금령, 원수에 대한 사랑, 자선과 기도, 단식에 대한 가르침, 물질에의 초탈,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 등을 권고받았으며, 특별히 마태오 복음 11,28-30의 말씀은 그들이 자주 회고하던 내용이었다.
(2) 공동체 상호간의 친교
공동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재원을 갖추는 것을 의미하는 친교로서의 생활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어서, 가난하고 곤궁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다양한 전승들 안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고 있다. 특별히 바울로 사도의 예루살렘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모금운동을 벌였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성령강림 이후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줌으로써 얻는 기쁨"을 경험한 사실을 보여준다(사도 2,44이하). 이러한 묘사로써 사도행전은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이상적인 공동체상(像)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역시 "애덕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예로 바르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서 받은 돈을 사도들에게 바침으로써(사도 4,26- 27) 사도들의 제자, 더 나아가서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선교 지도자로서 공동체 활동에 봉사하게 된다. 반대로 아나니아와 삽피라 부부는 땅을 팔아 돈의 일부만을 바쳤기 때문에(사도 5,1-2) 죽음의 벌을 받았다(사도 5,5). 물론 이 사건으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재산공유가, "공산주의"나 "집산주의"의 표현으로 보이는 단면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재산의 공동소유는 새로운 신앙의 열정에서 생긴 형제적 사랑의 자의적 원칙으로서 결코 의무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나니아 부부의 죽음은 사도들과 공동체, 무엇보다 하느님을 속인 결과였고(사도 5,4), 성령을 떠보는 죄의 결과(사도 5,9)였다. 따라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러한 생활은 공동생활의 원형이며 지배관계에서 해방된 성공적인 상호친교의 원형으로서, 무엇보다도 이런 사유재산의 집단의 집착에 따른 공동소유는 강제성이 아니라, 자발성을 전제로 하며 상호부조의 행위는 협동정신과 형제적 사랑 및 약속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종말론적 사상과 함께 현세재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감화되어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만 원조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원조받음으로써 서로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부상조의 정신은, 자진해서 바치는 구제금이나 헌금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친교를 나누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3) 이웃에 대한 봉사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구체적인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뿐 아니라, 그들의 근본 직능, 직무, 과업, 사명을 기술하는데 있어서도, "봉사"하는 개념을 쓰고 있다. 이 단어는 인간이면 누구나가 즉시 굴종을 연상하게 마련인 하나의 행동, 즉 식사 시중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설교 안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식사시중을 드는 가운데 사람들끼리 존재하는 지배관계, 즉 봉사받는 사람과 시중을 들어 야 하는 사람들과의 구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루가 17,7-9).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행위를 종 노릇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집니다"(마태 23,13)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인간실존의 가치전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가 하느님의 봉사적 실존의 원형을 친히 비유해 주는 인물로 등장하며 제자들과 공동체에 모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고(루가 22,24-29), 또한 예수가 봉사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고 있다는 것이 공동체 실존의 척도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단순히 식사시중이나 부양과 생계를 돌보는 자선행위만이 아니라 살거나 죽거나 그 어떤 때이던지 간에 "남을 위한 존재", 즉 처음부터 자신의 근본은 자기 인격을 다 바쳐 "타인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발견되는 것이다(마르 10,45; 마태 20,28; 요한 12,25-26).
그러므로 봉사를 통해서 온갖 집단들이 이해관계와 신분의 차별, 성(性)의 우열같은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장벽들이 지양되기에 이른다(갈라 3,26-29). 바로 이러한 점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섬기는 일", 즉 "남에 대한 헌신과 사랑 속에서 사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교회의 본질
지상생애 동안에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그 나라에 속하는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고자 의도하였고,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러한 예수의 선포와 행적에 입각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면서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양식을 갖고 살았다. 그 생활양식이란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예배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또 그들의 친교는 공동식사(성찬례)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소명을 기억하면서 자아의식을 새롭게 하였는데, 이런 의식은 성찬례를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자기소유의 개념을 뛰어넘어,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고 돕는 봉사의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였으며, 그들이 구제를 위해서 헌금을 할 때에도 헌금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바침으로써 세상을 위한 증거와 선교의 사명을 다하였다.
물론 이러한 점은 예배의 모임을 통해서 그들의 사명에 대한 일깨움을 얻고, 영적 친교의 증진을 통해서 공동체의 친교와 봉사는 세상을 섬기는 데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4. 교회의 특징
1) 하나인 교회(唯一性)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보호하심을 약속하시며(성령강림), 당신이 세우신 교회가 이 세상 마칠 때까지 세상 방방곡곡에 전파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길 원하셨다. 그런데 천주교회만이 같은 신앙, 같은 전례, 같은 가르침, 같은 제도를 가지고 하나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
즉, 전세계 9억 이상의 천주교회 신자들은 어떠한 파벌의식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님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완성자'라는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미국이나 프랑스나 한국이나 온 세계의 천주교회는 그 가르치는 교리나 종교의식(미사)이 동일하고 같은 성사 같은 기도 안에서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세계 천주교회의 외적인 일치는 곧 천주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 그리스도교라는 좋은 예이다.
2) 거룩한 교회(聖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이 공동체가 거룩한 것이 되기를 원하셨다. 이 거룩함은 바로 천주교회 안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 안에서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을 거룩하게 변화(성화)시켜 주신다. 천주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표현하는 내용으로서 미사와 일곱 가지의 성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당 안에서는 잡스러운 행동이 용납되질 않으며, 하느님께서 자리하여 계시는 성당에서 최대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천주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다. 즉, 천주교회의 역사를 보면 무수히 많은 성인·성녀들이 배출되었다. 이것은 천주교회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3) 공번되고 보편적인 교회(普遍性)
천주교회는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의 한국 명칭이다. '가톨릭'이란 단어의 뜻은 '보편적·공번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교회(라틴어로 ECCLESIA)라는 단어에는 '하느님으로부터 호출되어 모인 백성들의 무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천주교회는 처음부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 인류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모여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무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전세계에 퍼져 있으며, 공동체가 생긴 이래 인종과 민족, 성별과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전인류를 위해 존재해 온 것이다.
4) 사도로부터 계승된 교회(使徒繼承性)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파가 약 500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많은 그리스도교 종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시고 당신의 공동체를 맡겨주신 열 두 제자들에 의해서 유지되어 온 공동체는 천주교회 뿐이다. 특히 천주교회의 주교님들은 열 두 제자들을 대리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직책이다. 이 사실의 증거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5.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의무
하느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선포와 행적을 통하여, 당신을 따르던 몇몇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백성을 모으고자 하심으로써 교회를 창설하셨다.
우리 역시 이러한 기쁨과 사랑의 공동체에 초대를 받아 오게 된 것이며, 이곳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그분을 따르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인간역사 안에서 존재하는 한, 인간적인 동기와 한계에 제약을 받는, 인간에 의해서 구성되고 관리되므로 그 자체 내에는 한계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결합과 일치가 그 목표이지만 아직은 완성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자기이해와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양식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완성에 이르도록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자신이 선포하는 바를 낱낱이 실천하고 있지 못하고, 하나인 교회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실정이며, 여러 지체들간의 일치와 형제애가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는 상태이다. 교회의 참된 본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러한 현실들은, 교회를 이루는 각 구성원인 우리들이 헤쳐 나가야 할 임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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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10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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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위일체는 신앙의 신비이다
복되신 삼위일체의 신비는 곧 하느님 자신에 관한 신비이다.
이 신비가 다른 많은 신앙의 교의를 알아듣게 하는 빛이 되며 또 그 많은 계시진리가 이 신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신비야 말로 신앙의 진리들의 계층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고 본질적인 교리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라"는 명을 내리실 때에, 그분은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가르치셨다.
"너희는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
그러므로 아타나시오 신경에서는 이렇게 삼위일체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삼위로 계신 한 분 하느님을 예배하며, 일체로 계신 삼위를 예배하나이다. 성령도 구별되는 한 위격이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신성을 가지시며 동등한 영광과 똑같은 위엄을 가지시느니라."
이처럼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한 분 계심을 믿는 것이며, 아울러 영원으로부터 동일한 신성을 소유하시면서 구별되는 세 위가 계심을 믿는 것이다.
유일한 하느님, 유일한 신성이 계시다고 하는 말은 신적 존재가 다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원천이요 목표는 오직 한 '지혜' 한 '사람' 한 '생명'이 계실 뿐인데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구분되는 세 위이지만 무한하신 한 지혜로 우리를 아시고 영원하신 한 사랑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은총을 통해서 우리는 삼위와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의 신비인 것이다. 하느님께 감추어져 있어서 신적으로 계시되지 않으면 알려질 수 없었던 신비들 가운데 하나이다. 계시 진리의 어떤 것은 이성의 탐구의 대상이 되고 이성에 의해서 발견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같은 신비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신앙의 신비인 것이다.
2.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하느님
구세사의 시초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가 온전하고 확실하게 계시되지 않았었다. 하느님은 단계적으로 당신께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다. 구악성서에도 이 진리의 예표들이 있지만, 삼위일체의 신비가 정식으로 계시되지는 않았다.
이 신비가 계시된 것은 신약성서이다. 성자와 성령이 알려지고, 그분들이 하느님이시며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들이심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하느님은 한 분 뿐이라는 진리를 견지하면서도, 이 진리들을 명확하게 종합하는 데는, 여러 세대를 거쳐 기도와 반성,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했다.
1) 구약성서에 계시된 삼위일체의 하느님
삼위일체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모르고 있었다. 기원전 1850년경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느님께서는 여러 신을 믿는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정하시고 자신을 밝히시기 시작하신다. 에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준 후 40년간 광야에서 인류사적 실생활을 통하여 교육하시고,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호의를 베풀고 기적과 말을 들려 주시며, 당신은 전능의 하느님, 유일한 하느님이심을 알려 주신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출애 20,2-3).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시는 분으로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고 다른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하신 신으로 "우리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 이제 알아라 내가 바로 그다. 나 외에는 신이 없다"(신명 6,4; 32,39)라고 말씀하여 주신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에게 감추어졌던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신다. 그러나 구약성서 안에서는 세 위에 대한 정확한 구분은 없고 다만 세 위들이 계시다는 것을 희미하게 암시하여 주는 귀절들이 몇 있다. 교부들은 하느님을 지칭하는 복수명사(엘로힘)가 자주 쓰였다는 점과 하나이신 하느님께 복수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창세 1,26) 하느님의 이름과 속성을 세 번 거듭 부르는 일(신명 6,4)등이 이 세 위를 암시하는 속성으로 이해하였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하느님
신약성서도 체계적으로 정립된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한 교리를 명시적으로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바로 하느님의 내밀한 본성의 계시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신비는 여기서 체험된다고 보아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거론되는 하느님은 구약에서 역사하는 하느님으로서 한 아들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을 부여하는 하느님을 뜻한다. 여기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울러 증언되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현존'(마태 12,28)이며, 구약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선포된 율법을 능가하는 전권의 소유자이고(마르 2,23-28; 3,1-8),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시다(루가 4,18).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성자)와 성령이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증언되기는 하지만, 신약성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고(요한 14,16.20; 15,26; 17,3; 갈라 4,6)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 각기 고유한 관계를 맺고 있다.(마태 11,27; 요한 1,1; 8,38; 10,38; 15,26) 이를테면 나자렛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느님(성부)의 현존이면서도 성부 자신은 아니다. 또 성령도 하느님(성부)의 자기 전달이지만, 하느님(성부)과 구별된다. 이와같은 점들을 통하여 볼때 신약성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의 하느님 단일성과 구별성을 모호하게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단순히 하느님과 조물 사이의 중간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같이 배열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성서 귀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위로 올라 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그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마르1:9-11).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시며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이다"(로마1:3-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에게 누리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구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
3. 삼위일체교리
삼위일체 교리는 절대 신비로써 실증적 계시와 독립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이성에 의해서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절대 신비가 있다면 이 삼위일체 신비이고 가장 기본적인 신비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 하느님이 세 '위격'으로서 존재하는데 위격들은 하느님 본질이며, 하나의 하느님 실체이다. 이 세 위격들은 동일하고,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시다.
2) 그런데 이 세 위격들은 서로 구별된다. 성부는 다른 원천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출생하였다. 성령은 출산되지 않고 하나의 유일 원리로서의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된다.
3) 하느님 안에는 실제로 구별되는 관계가 있으며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과의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 하느님의 위격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다.
4) 하느님의 관계적 위격들은 하느님의 본질과 실제로 구별되지 않아서 이 본질과 함께 하나의 삼위일체를 구성하지 않다. 하느님 안에서는 상반되는 관계가 존속하지 않는 한, 만사가 하나이며 각 신적 위격은 전적으로 하나이기에 세 위격들이 각기 하나의 참 하느님이시다.
4.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인의 생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 만 아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 14,23-26).
이와같이 성부는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초자연적인 생명을 얻게 하시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생명을 받아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이며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셔서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변모되기까지 영혼의 성화를 완수하신다. 이처럼 성령은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생활의 완성을 향해 부르고 있으며, 이 완성이 곧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이룬다.
우리는 현세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머리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형언하는데 사용되는 인간 언어가 하느님께 관한 숭고한 진리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미비하다. 그러나 기도에 정진하고 묵상과 사랑을 익혀가면, 우리도 영원하신 성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거처하는 성령께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커져 가리라 믿는다.
모든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목표는 복되신 성삼위를 알게 되는 데에 있다. 성삼위의 하느님이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관해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와 사랑으로 엮어지는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에 우리도 한 몫 끼게 되는 것이다(1요한3:2).
5.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삼위일체의 하느님
하느님 안에는 모든 것이 완전한 상태로 있다. 그런데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발산된 두번째 위가 있는데 그분은 신성한 말씀이시다. 그리고 완전한 이 실체들의 상호적인 사랑으로부터 세번째 위가 태어나는데 이 위는 사랑 혹은 성령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처음의 두 근원, 즉 첫번째 위와 두번째 위로부터 발산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두 위로부터 발산되고, 그 위가 서로를 알고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랑이 완전하고 무한한 두 근원으로부터 발산되므로 성령 역시 성부, 성자와 같이 영원하고 무한한다. 또한 무한하신 하느님은 당신 자신이 파괴되거나 감소되지 않은 채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른 두 위에게 다 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한한 근원이시고 또 무한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에 당신 자신은 아무 것도 잃지 않으신 채 당신 스스로 가지신 모든 것을 전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서로가 사랑 안에서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도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나와의 사랑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들이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나눌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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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09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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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세사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
성령께서는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제 3위로 계셨다.
그러나 인간이 성령께 대하여 알게 된 것은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이다. 구약성서에 하느님의 영(얼, 혼, 기운, 숨)으로 표현된 성령께서는 창조사업에도 참여하셨고(창세 1,2), 구약시대에는 하느님께서 선택한 일꾼들(모세, 여호수아, 삼손, 다윗, 여러 예언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이사야 예언자는 앞으로 성령을 가득히 받아 일할 구세주를 예고하였고(이사 11장), 요엘 예언자는 만민에게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 줄 날이 오리라고 예언하였다(요엘 3장).
구약에서 예언된 구세주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심으로써 이 세상에 오셨고(루가 1-2장),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실 때에는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 오셨고,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의 유혹을 이기심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셨다(마태 3-4장).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은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마태 12,28).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 주셨으며, 오순절날 함께 모여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모두 성령을 가득히 받았다(사도 1-2장).
초대 교회에 있어서 사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도 보편적이었던 성령의 은사는(사도행전, 고린토 전서 12장 참조) 그동안 교회 안에서 수많은 성인 성녀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교회 안에 나타나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주었지만, 일반신자들 사이에는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초대 교회 신자들처럼 일반신자들도 성령의 여러 은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주고 계신다.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하기 전과 공의회 동안 계속하여 "오, 주여! 새로운 성령강림과도 같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오늘날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시며 모든 신자들에게 기도를 당부하셨다. 그 결과 공의회 후에는 가톨릭 성령쇄신 운동이 시작되었고, 공의회 문헌에는 성령께 관하여 언급한 부분이 252군데나 나온다.

2. 교회 안에 머물고 계신 성령
1) 성령과 부활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아버지께서 '높은데로부터의 힘'을 보내 주실 터이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당부하신다(루가 24,39). 루가 복음 사가는 데오필로에게 바치는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부탁을 소개하면서 아버지의 약속이 다름 아닌 오순절에 제자들이 받게 될 성령으로 인한 세례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분은 사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실 때에 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명령하시며, '여러분은 내게서 그 약속에 대해 들었다. 사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여러분은 며칠 후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사도1,4-5).
이어지는 예수의 승천기사에서 루가는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사도행전의 청사진을 이렇게 밝힌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내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이제 성령의 역할은 세례자 요한과 지상의 예수께 국한되지 않고, 열 두 제자들을 중심으로 태동하게 될 교회공동체에 그 영향력을 확장시킨다. 사도행전에서 성령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다른 어느 신약성서 저서들에서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령은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약속이지만, 그 약속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포된다. 하늘로 높이 들어 올려지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제자들에게 전달하신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시는 한편 제자들에게 내려진 성령은 다시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아버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전달하는 대목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분은 하느님의 오른 편으로 높이 올려져 앉히시고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의 약속을 받으신 다음에,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 성령을 쏟아 주셨다. ...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곧 여러분이 십자가 형에 처한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로 삼으셨다"(사도2,33-36). 따라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분께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이제 성령을 받은 사도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신생 교회 안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2) 성령과 새로운 공동체
오순절에 내려온 성령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성령이 예수의 탄생과 공생활의 시작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듯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의 태동에 즈음하여 성령은 인류 역사에 개입해 오시는 하느님의 가시적 현존이 되면서 구세사의 새로운 시대를 개막한다.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같은 혀들이 갈라지면서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각자 위에 내려 앉았다. 그러자 성령으로 가득차서 영이 그들에게 일러주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2-4).
루가복음 사가는 성령으로 인한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세계도처에서 모여온 순례자들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다(사도 2,5-11).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예언자 요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결정적인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들에 있을 일이라. 나는 모든 육신에게 나의 영을 쏟으리니, 너희의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리라. ... 그러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사도 2,17-20참조; 요엘 3,1-5).
한마디로 루가는 수많은 인종들을 증인으로 내세운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하여(사도17,16-39), 성령의 내리심과 더불어 태동한 새로운 교회공동체의 진로와 방향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한 인류의 보편적 구원'으로 확고하게 정해 놓은 셈이다.
3) 성령과 12사도
모든 인간이 성령 안의 새 생활을 하길 원하시는 성부께로부터 파견을 받아 인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인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기 전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셨고(마르 1,8),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당신께서 아버지께 구하면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14,16-17).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오래지 않아 제자들이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사도 1,5).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떨고 있었는데(요한 20,19.26), 오순절 날 새로운 삶을 가져다 주는 성령을 받아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고(사도 2,2-13), 군중에게 설교를 하며(사도 2,14-36), 앉은뱅이를 고치고(사도3,2-10), 박해를 받으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담대하게 전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전파하는 그분의 제자들과 증인들을 인도하는 힘이다. 성령은 그들의 행위를 지시하기도 하고(사도 2,41; 4,31; 10,19,44; 11,28; 13,2,4; 15,28; 19,21; 20,22,28), 억제하기도 한다(16,6.7; 21,4).
그런데 사도행전의 특이한 점은 성령이 항상 12사도단의 존재와 권위에 관련되어 내려 온다는 사실이다. 곧 성령은 12사도단이 모여 있을 때, 또는 사도단의 일원이나 사절이 참석해 있을 때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령은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핵심을 이룬 12사도단과 처음부터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신다.
12사도단의 권위와 성령의 도움은 신생교회를 세상에서 존립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두개의 중대한 원동력이다. 루가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과 가르침에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서로를 불가분의 관계로 성립함으로써 이상적인 교회상을 제시하는데 성공하였다. 루가에게 있어서 성령과 교계제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두 아버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만민 구원이라는 '보편적 구원계획'을 성취시키는데 기여한다. 제도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직된 교조주의나, 이와는 반대로 제도권에서 벗어나 카리스마적인 체험만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인 경향은 루가가 제시한 이상적인 교회상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께서 거주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서, 주님과 성령 안에서 건설되어야 한다(에페2,21-22).
4) 교회제도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
공동체 안에서 주교나 사제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성령께서 공동체의 각 구성원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살아 있는 교회 전승과 대조하여 이것을 종합하여 공동체 전체의 선익을 위해 그 문제점을 올바르게 찾아 이끄는 데 있다. 그 문제점을 찾아내기 위하여 주교와 사제는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받고 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권위와 순명에 대한 의미도 시대의 변화와 역사 속에서 조금씩 변형되어 왔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만을 지도자로 모셨을 따름이며 그들은 모두가 주님의 자녀일 뿐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최고 관심사가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는 성령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성령께서는 자녀들의 삶 가운데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내리시는 선물을 통해서 그들 자녀들에게 스스로 느끼도록 말씀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형제들의 생활 그 가운데에 언제나 현존하신다. 성령께서 공동체의 완성을 위해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뜻과 방법을 모든 그리스도인은 알아듣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신앙인은 성령의 뜻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성령 안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될 때, 모든 신앙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현실 속에서의 권위와 순명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 성령의 활동
성령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제 3위로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협조자(요한 14,16)이시다. 성서에는 물(요한 7,37-38), 불(마태3,11), 기름(루가 4,18), 바람(요한 3,8), 비둘기(마태 3,16) 등이 성령의 상징으로 나온다.
이러한 상징들은 우리를 깨끗이 정화시키고, 생명을 주고,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붙여 주며,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성별시키고, 자유와 평화를 주는 등 성령이 우리 안에 이루시는 일들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과의 체험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새 생활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영이신 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변화된 생활, 풍성한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부께로부터 파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다.
1) 성령께서 하시는 일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성령이 오시면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 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당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령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체험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체험하며 하느님이 참으로 자신의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해 주시는 주님의 다스림과 가르침이 삶의 기본 원칙이 된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맛들이며, 자기 마음 안에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면 성서말씀, 전례생활, 성사생활이 더욱 생명력있게 다가오며 그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체험도 하게 된다. 성령의 도움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이들은 성령 안에서 사셨던 성모님과 성인 성녀들의 생애를 깊이 이해하게 되고, 이웃과 보다 친밀한 사귐을 나누게 되며,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된다.
2) 기도생활을 도와 주는 성령
성령께서 에페소 교회의 신자들에게 내리셨을 때 신자들은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고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사도 19,6). 이상한 언어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 들을 수가 없고,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1고린 14,2).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신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탄식하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신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신다. 그리고 마음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신다(로마 8,26-27).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는 자기자신을 돕는다(1고린 14,6). 바울로 사도는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권면한다.
성령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기도 생활의 변화이다. 그는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기도생활에서 벗어나고 기도생활에 맛들이게 되어 전보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게 된다. 그는 더욱 자주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게 되고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며,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언어로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초대 교회 때에는 성령께서 내리신 경우에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며(사도 2,4; 10,44-48; 19,6-7), 오늘날에도 이 은사를 갈망하는 경우에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내려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이 이상한 언어는 성령의 힘으로 하는 것이기에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어떻게 기도해야 좋을지 모르는 우리를 도와 주시려는 성령께서 영감을 불어 넣어 주시는 기도로서, 우리의 기도생활을 풍성하게 해주고 영적인 성장을 도와 주며 보다 풍성한 성령 안의 생활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다른 이보다 이상한 언어를 더 많이 말할 수 있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1고린 14,18).
성령 안의 생활에 있어 기초가 되는 은사인 이상한 언어는 주로 봉사은사가 아닌 기도은사로 사용되지만, 때로는 해석의 은사와 함께 사용됨으로써 예언의 은사와 비슷하게 봉사은사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성으로 하는 노래처럼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한 언어로 하는 기도는 심령기도라고 부르고, 이상한 언어로 하는 예언은 심령 예언이라고 부르며, 이상한 언어로 하는 노래는 심령노래라고 부른다.

4. 성령의 은사와 열매
1)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9가지 은사
"은총의 선물은 여러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2,4,7).
성령께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보다 능력적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9가지 은사를 주신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직책을, 어떤 사람은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을, 어떤 사람은 여러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은 같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을 나누어 주신다(1고린 12,8-11).
성령께서는 우리가 공동체에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봉사 은사를 베풀어 주시고 키워 주신다.
(1) 지혜의 은사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1고린 12,8)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실천적인 말을 하게 하여 주어진 환경 속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한다.
(2) 지식의 은사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거나 설명하거나 설교를 할 때 영감을 받아 말함으로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은사이다.
(3) 믿음의 은사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골로 2,20). 어떤 일이나 기도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적 확신을 줌으로써 기적을 이루는 바탕이다.
(4) 치유의 은사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1고린 12,9). 자연적 수단이 개입될 수 있지만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역사에 기인된 육체적 심리적 영신적 치유 즉, 재생이 일어나는 성령의 현현이다.
(5) 기적의 은사
"그 무렵 사도들은 백성들 앞에서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베풀었다"(사도5,12). 자연적 은혜를 넘어서서 놀라움과 더불어 주어지는 은혜로, 중대한 병의 즉각적인 치유같은 윤리적 기적 등이 있다.
(6) 예언의 은사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1고린 14,5-39). 하느님께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나 공동체에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7) 분별의 은사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시험해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1데살5,19-20). 하나의 생각, 활동, 사건 그리고 은사의 원인과 근원이 다른 무엇의 힘인지 아니면 성령인지를 아는 것은 사람에게 보여주시는 내적 계시이다.
(8) 심령 예언의 은사
"어떤 사람은 여러가지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다"(1고린12,10). 기도회 때 어떤 사람(보통으로 성령 안에 성숙한 사람)을 움직여 영적인 깨달음을 은사적 언어(이상한 언어로) 큰 소리로 내어 말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이다.
(9) 해석의 은사
"이상한 언어를 말할 때에는 둘이나 많아야 셋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주어야 한다"(1고린14,27). 한 사람이 큰소리 심령 예언을 하면 그 일반적인 뜻을 모국어로 말하도록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이다.
2) 개인의 성화를 위한 7가지 은혜
성령께서는 개인의 견고의 은사로 우리에게 7가지 은혜를 베푸신다.
(1) 슬기 :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보다 귀하게 아는 지혜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구원과 하느님 나라의 사정에 관심을 갖게 한다.
(2) 통달 : 구원의 진리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은혜이다.
(3) 의견 : 우리가 행할 선과 피해야 할 악을 식별하게 하는 은혜이다.
(4) 지식 : 믿어야 할 진리와 믿지 말아야 할 허위를 식별하는 은혜이다.
(5) 굳셈(용기) : 신앙생활에 수반하는 장애를 극복하는 힘을 주는 은혜이다.
(6) 효경 : 하느님께 대한 자녀적 사랑을 증진시키는 은혜로서 하느님께 대한 열성을 북돋아 준다.
(7) 두려움(경외심) :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의 마음을 상할까 염려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는 은혜이다.
3) 성령의 9가지 열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활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
(1) 사랑 :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아가페적인 사랑, 즉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다.
(2) 기쁨 : 기뻐해야 할 일이 없어도 샘솟는 기쁨, 하느님의 사랑,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느끼는 것이다.
(3) 평화 : 세상풍파 속에서도 유지되는 평화로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4) 인내 : 비록 일이 지연되는 경우라도 실망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5) 친절 : 이웃의 어려움을 알고 따뜻하고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6) 선행 : 주님께서 주신 재산, 시간, 재능을 관대하게 다른 이를 위하여 사용한다.
(7) 진실 : 거짓이 없이 신뢰할 수 있고 착수한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충실성을 의미한다.
(8) 온유 : 자제된 힘, 약자에 대해서도 부드럽게 대할 수 있는 힘이다.
(9) 절제 : 육정을 눌러 주님의 주권하에 복종시키는 힘과 권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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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