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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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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3. 23:14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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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체성사란?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곱 성사 가운데 으뜸되는 성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재현을 뜻하기도 하고(제사로서의 미사), 영적 생명으로 우리에게 넘겨 주신 당신의 몸과 피(성체와 성혈)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스도는 세상 마칠 때까지 교회로 하여금 십자가의 제사를 계속하고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가운데 당신의 구원 사업이 계속 이어지고, 당신 자신이 우리와 일치하는 가운데 우리끼리도 서로 하나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속한다. 성체는 단순히 상징이나 예식이 아니라 인간이 예수님의 구속활동과 하느님의 은총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성사이다. 바로 이 이유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이고 절정이다.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존하시고, 성체는 교회 안에 파스카 신비를 재현하므로, 성체성사는 교회의 모든 직무와 사도직의 "원천이고 절정"(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5)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신과 노동과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와 함께 봉헌하도록 불리우고 인도된다"(직무 5).
    2. 성체성사와 구약의 파스카 잔치
    구약성서에 나타난 많은 제사에서 거룩한 잔치가 예배의 한 요소였으며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느님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노아(창세 8,20)와 아브라함(창세 15,9)의 경우에도 음식을 바치는 제사 가운데 하느님과의 계약이 맺어진다. 그 후 그들의 후손들이 이 계약 준수를 거절해도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출애굽(이스라엘이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한 사건)을 통하여 구약에서 가장 큰 계약을 시나이산에서 맺으셨는데, 이러한 과정 가운데 잔치(음식을 나눔)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출애 12,3-5.11-14.17).
    이렇게 식사는 해방이라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에집트에서 탈출하기 전 가족 단위로 음식을 나누었던 사건이 출애굽 사건 전체를 드러내 주는 상징으로 여겨져, 하나의 예식이 되어 대대손손 전해지게 되었는데, 이를 파스카 잔치라고 한다.
    에집트로부터의 구원사건 전체가, 파스카 양과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이루어진 파스카 잔치 예식을 통하여 계속 기념되었다. 이 잔치 때에 하느님의 백성은 자기들이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주님과 맺은 계약을 갱신하였다. 예수님 자신도 최후만찬 때 이 파스카 예식을 행하신 것으로 보인다.
    3. 예수의 최후의 만찬 : 성체성사를 세우심

    사람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최후만찬을 하시던 중에 성체성사를 세우셨으니, 빵과 포도주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로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예식을 계속 행할 것을 명하셨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돌아가시기 전에 베푸신 최후만찬 때에 주님은 새로운 기념 제사를 세우셨다. 먼저 예수님은 파스카 예식을 거행하셨다. 이 거룩한 밤에 예수님은 다가올 새 선물에 관해서 말씀하셨고, 과거의 보배는 새 선물의 그림자나 모형에 불과했다고 하셨다. 그분은 새 계약의 규정을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저녁식사 도중에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먹는 예식을 하다가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마태 26,26). 그분은 포도주가 든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20). 끝으로 그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라고 명령하셨다.
    파스카 잔치와 마찬가지로 새 계약을 이루는 이 기념 제사(미사)도 제사인 동시에 거룩한 식사이다. 십자가의 제사를 피흘림 없이 재현하고, 그 제사의 구속 은총을 적용하는 미사성제에서 주님이 희생으로 바쳐진다.
    4. 초대교회의 성찬례(미사)
    초대 교회생활을 기록하던 당시의 교회 저자들은 성찬예식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니, 성찬이 공동체의 기본적 행사였고,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가장 잘 표시하고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성 루가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 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던"(사도 2,42) 예루살렘의 새로운 신자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던 초창기에 신자들은 보통 이웃에 있는 유다인 회당에서 행하던 성서 중심의 예식에 참석하고,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하여 서로의 집에 모여서 주의 만찬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복음과 새로운 생활이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사도 2,43-47).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성서 독서의 계획표와 기도문을 작성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은 기념제사 식사와 합류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말씀 전례와 성찬 예식의 병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지내는 성찬예식에도 계속 남아 있다.
    5. 미사(성찬례)
    미사는 십자가 위에서 바칠 제사를,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 식사의 형태를 빌어 행하신 것을 재현하는 제사이니, 이를 통하여 교회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그분의 구원 사업을 계속 이어나가는 동시에, 미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네주시는 당신 몸과 피로 영적 음식을 취한다.
    미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특히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제사를 성사적으로 거행한 최후만찬의 재현이다. 따라서 미사는 십자가 제사이자 파스카 잔치이다.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시는 것은 아니지만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십자가 위에서 한 번만 봉헌된 피흘린 제사가 재현되고, 그것의 기념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보존되어, 거기에서 나오는 구원의 힘이 우리가 매일 범하는 죄악을 용서한다.
    십자가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사에서도 예수님이 성부께 끝없이 무한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주례 사제이며 제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사에서는 교회가 예수님과 공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교회는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합쳐서 봉헌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제와 제물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1) 미사의 구조 <앞에서 강의하였으면 간단히 설명>
    미사는 크게『말씀전례』와『성찬전례』로 나눌 수 있다. 미사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시작예식(始作禮式)
    사제가 제대 앞으로 나옴
    - 입당 - 인사 - 참회 - 자비송 - 대영광송
    - 본기도(그날 미사의 주제가 드러남)
    ②말씀전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
    - 제1독서(보통 구약에서 뽑으며, 그날 복음과 관계되는 구절)
    - 화답송(성서의 시편으로서, 방금 들은 말씀에 대해 감사, 찬미드림)
    - 제2독서(복음을 제외한 신약에서 뽑음)
    - 복음 환호송(알렐루야는 '하느님을 찬미하라' 라는 뜻으로,
    복음을 듣기 전에 백성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환호임)
    - 복음 - 강론 - 신앙고백 - 보편지향기도
    ③성찬전례
    주님의 최후만찬을 재현하면서 십자가 제사를 기념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서 봉헌노래를 부르고 미사예물(헌금)을 바침
    - 예물기도 - 감사송 - 거룩하시도다 - 감사기도 - 주의기도
    - 평화 예식 - 빵 나눔 - 하느님의 어린 양 - 영성체 전 기도 - 영성체
    - 감사침묵기도 - 영성체 후 기도
    ④마침 예식
    파견
    - 강복 - 파견
    (2) 미사의 집전자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셨다. 미사를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품성사를 통하여 부르시고 날인하여 당신의 대리자로 행동하도록 권한을 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도에 따라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주교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축성의 말을 할 때에 신약의 제사가 재현되어 신자들이 참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신자들도 자신들의 "왕다운 사제직"(1베드 2,9)의 힘으로 봉헌에 참여한다. 신자들이 영성체를 함으로써 또한 "사제의 손을 빌어서 제물을 봉헌할 뿐 아니라 그 제물을 사제와 함께 봉헌하며, 자기 자신도 제물로 봉헌하면서"(미사경본2, 서론 62), 신비체의 지체로서의 직책을 완전히 이행함으로써 봉헌에 참여하는 것이다.
    (3) 제의(祭衣)의 색(色)
    미사 중에 사용되는 색은 5가지가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 흰 색 무죄함과 환희, 부활의 상징으로서 순교하지 않은 성인들, 성모, 천사 축일과 부활, 성탄시기에 사용.
    - 붉은색: 피(순교)와 사랑을 상징하며, 성령, 순교자 축일에 사용.
    - 녹 색: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그리스도교의 희망을 상징하며 대림, 성탄, 사순, 부활시기가 아닌 연중시기에 사용.
    - 보라색: 참회와 겸손의 표시로서, 대림시기, 사순시기에 사용.
    - 검은색: 죽음을 상징하며 장례미사 때 사용.
    이밖에 흰색 대신 노란색을 사용하기도 하고, 대림 제3주일과 사순 제4주일에 참회 가운데 기쁨을 드러내기 위해 장미색을 사용하기도 한다.
    (4) 미사지향과 미사예물
    사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만인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 백성의 여러 가지 요구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 안에서 성부께 미사를 봉헌한다. 하느님만이 이 완전한 숭배와 찬미를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제사는 하느님에게만 봉헌된다. 미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만인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총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지내는 것이다.
    신자들이 자기들의 특별 지향, 죽은 이의 영원한 안식, 어떤 영신적인 또는 현세적 필요, 하느님께 감사의 표시 등을 위하여 미사를 드려달라고 청한다. 이런 청을 할 때에 보통으로 금전적 기부를 한다. 이 미사예물은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미사성제에 좀더 깊이 참여하고자 한다는 원의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미사예물의 봉헌자는 미사성제에 자신의 제물을 첨부하면서 교회와 사제들의 생활을 경제적으로 돕는다. 결국 미사예물을 빌미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신앙 자세라 할 것이다.
    또한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번 돈의 일부(원래는 십분의 일을 바쳤다)를 교회에 바칠 뿐만 아니라, 교회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돕고 사제의 생활을 위해 돈을 희사하게 된다. 교무금(敎務金)은 각 신자가 교회(일반적으로 본당 신부)와 협의하여 매달 얼마씩 내겠다고 약속한 금액이며, 이외에도 매번 주일미사에 참석할 때마다 감사헌금이나 교회의 특별 활동(예: 성전 신축기금)을 위한 헌금을 한다.
    이 모든 헌금 행위는 자기가 번 돈은 자기가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며 따라서 모든 재물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6. 성체와 성혈
    성체와 성혈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교회는 미사 중에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이는 내 몸이요", "이는 내 피니라"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선언을 받아들여 성체와 성혈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고백한다.
    (1) 영성체
    성체성사(성체와 성혈)를 받는 것을 영성체라고 한다. 영성체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자신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형제자매들과도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먹으면서, 말씀전례 때 들은 하느님의 말씀(말씀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다!)대로 살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보통 경우에는 하루 한 번만 영성체를 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 경우에는 하루에 두 번 영성체하는 것을 허락한다. 성체만 영하거나 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우리 안에 모시게 된다. 그리스도는 성체와 성혈 모두에 온전하게 현존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영성체를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지에 관한 하느님의 법은 없다. 교회는 신자들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사순절 시작과 부활시기의 끝 사이에 영성체하라고 명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히 성체를 자주 받아 영하여서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깊게 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주 혹은 매일이라도 미사에 참여하고 영성체를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한다(교회헌장 42).
    (2) 영성체 준비
    성체성사를 합당하게 받자면, 영세한 가톨릭 신자로서 은총 지위에 있고 성체에 관한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 대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영성체 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대죄를 범한 사람이, 영성체를 해야 할 긴급한 사정이 있으나 고해성사를 볼 기회가 없으면 영성체 전에 완전한 통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후에 기회가 오면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신약성서는 영성체를 합당하게 할 중대한 의무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1고린 11,27-29).
    우리가 영성체하기 전에 한 시간 동안 음식과 술을 먹지 말 것을 교회는 명한다. 이 공복재(空腹齋)는 성체로써 우리가 받는 그분에 대한 외적인 존경의 공동표시이고 참회하는 준비이다. 환자와 노인에게는 15분의 공복재로 넉넉하다.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복재가 필요없다. 또, 물을 마시거나 약을 먹는 것은 허용된다.
    (3) 영적 음식으로서의 성체성사
    성체성사의 가장 자명한 표징은 음식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파스카 잔치에서 사용되던 음식은 구약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방의 주식이었다. 서방교회에서는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최후만찬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성 바울로는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순수성과 새로움의 상징이라고 보았다(1고린 5,6-8).
    포도주가 사용되는 미사에는 음식의 상징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최후만찬 때에 먹고 마시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음식을 상징하고 있는 것과 잘 맞는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요한 6,35.55).
    (4) 일치의 성사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치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빵과 포도주가 그 자체로 일치의 상징이다. 많은 밀알이 모여서 빵을 이루고, 많은 포도알이 모여서 포도주를 이루듯이 하느님의 가족이 모여서 하나가 된다. 공동체가 빵을 나누어 먹는 그 자체가 일치를 상징한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단일성을 표시하고 동시에 실현한다". 사랑이 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일치를 이룩한다.
    영성체가 강조하는 일치는 우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일치인 것이다(요한 15,4).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하여, 우리는 서로 함께 뭉치고 사랑의 활동을 통해서 서로를 위한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된다. 성체성사가 세 번째로 상징하는 것은 우리의 천상 유산이다. 성찬예식 전체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옥좌 주위에 모여서 하느님 자신을 영원한 보상으로 받을 것이다.
    미사참례는 우리를 지상의 살아 있는 교회와 일치시킬 뿐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신앙으로 표시되어 우리보다 먼저 죽은 이들과도 일치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성제를 봉헌하며, 모든 성인들과 결합함으로써 천상의 예배하는 교회에 매우 밀접히 일치하는 것이다"(교회헌장 50).
7.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성체 안에 빵과 포도주의 외형 아래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교회의 신앙은 요한 복음에 기록된 예수님 자신의 설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요한 6,22-71). "나는 생명의 빵이다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48.51). 어떤 사람들은 이 약속이 믿기에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불신자들이 떠나갔어도 예수님은 당신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셨고, 당신 말씀에 대한 불신자들의 이해를 바꾸려 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놓고, 당신은 실제로 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말씀한 것이라고 해명하지도 않으셨다.
성체 안의 경이스러운 현존 양식은 독특하다. 교회가 믿고 기도하고, 자선사업과 신앙의 활동을 할 때에, 교회의 주교와 사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백성들을 다스리고, 성사를 집행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나 미사 때에 이루어지는 성체성사 안에 예수님의 현존은 참된 현존이라고 묘사될 만큼 특별한 성격을 갖는다. 다른 여섯 가지 성사는 신자로 하여금 활동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상봉하게 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성체성사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사제가 예물을 들고 봉헌의 말을 했을 때 빵과 포도주는 없어지고, 그때부터 우리 앞에 놓여있는 빵과 포도주의 형체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몸과 피인 것이다. 예수님은 영성적으로 당신의 지식, 관심, 활동으로서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방법으로, 전체적으로, 하느님이며 사람으로서, 실제적으로 또 영구히 현존하신다. 봉헌 후에 빵과 포도주의 외형이 남아 있는 한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계속 현존하신다.
8. 성체 신심
교회의 초기에 성체를 보존하던 중요 이유는 전례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 특히 환자와 죽어가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영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주님의 성체를 존경스럽게 모셔가곤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 성체에 대한 신심은 깊고 넓혀져 갔다.
성체성사가 있는 곳마다 우리의 주님이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그래서 이 성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어디서나 예배드려야 한다. 성체에 대한 예배는 무릎을 꿇거나 절하기, 성체조배 등 여러 가지 방법과 여러 가지 신심 행위로써 표현된다. 13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성인들의 힘으로 성체 대축일이 제정되었다. 가끔 성체를 보통으로 모셔두는 감실에서 제대 위로 모셔 내놓고 조배하는 방법(성체현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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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13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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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의 의미와 물로 씻음에 대하여
세상에서 물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이 없다. 물은 생명과 직결되고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인간 생명의 발생부터 인간 생명의 유지에까지 물은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류 역사를 통하여 풍습과 종교 속에는 물이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풍부하게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데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어떤 중대한 일을 앞두고 물로 몸을 씻는 풍습이 있다. 즉 하늘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과거를 보러 갈 때는 목욕 재개를 하였다. 이는 내적인 정화를 외적인 양식으로 표시한다는 뜻에서 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목욕을 함으로써 마음이 정화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씻는 예식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갠지스강에서 몸을 씻으면 정결한 자가 된다고 믿고 있으며, 부정이나 허물을 씻는다는 의미에서 정결 예식을 행하였다. 이는 물이 지니는 생명의 근원성과 동시에 정화의 능력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여된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시 세례성사, 즉 초자연적인 생명에로의 재생의 표징으로 물을 사용하고 있다.
희랍어의 세례라는 명사는 '잠기다' , '씻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세례는 물에 잠기고 씻음으로 과거의 생활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이며, 이로써 하느님의 자녀와 그리스도의 형제로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성토요일에 세례 성사를 거행해왔고, 그 전례에서는 매우 아름다운 찬미가와 기도로써 성세수를 축성하고 구원사에서 물이 차지하는 역할을 강조하여 왔다.

2. 세례란 무엇인가?
1) 세례의 성서적 배경 고찰
① 구약에서의 세례 예표
- 창세 7, 17-24 : 세상의 죄악을 물로써 멸망시키다.(세례수로 낡은 사람을 파괴함을 의미한다.)
- 에제 36, 25-26 :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주고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주리라.
② 신약에서의 세례 예표
- 요한 3, 3-5 :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마태 28, 19-30 :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물에서 모든 생명이 나왔으며, 요한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세 때 물을 사용하는 이유는 성세가 재생의 성사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중요성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노아의 홍수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노하심으로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멸망되었으나,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예외적 존재인 노아의 가족은 깨끗하게 된 땅에 새로운 인류를 번성시키게 된다. 여기서 물은 악으로 가득한 세계를 멸하고 새로운 인류의 새 생명의 탄생을 뜻하고 있다. 물로 성세를 받음도 이와같이 우리 안에 악의 요소를 멸하여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을 말한다.
2) 요한의 세례
세례는 회개의 행위이다. 달리 말하면 세례는 겸손과 진리의 행위인 것이다. 세례 성사의 설정자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지만, 복음서에서는 세례에 대한 기사를 예수님 전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요르단강에서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고, 몰려왔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다.
이 세례는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해 회개를 하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드러내는 외적 표시이며, 세례를 받기 전에 진정한 자기 속죄가 요구되며,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분께 용서를, 빌 때 비로소 세례의 참뜻이 있음을 알아들을 수 있다.
3) 예수님의 세례
예수님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의 세례는 죄를 보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함이고, 또한 물 가운데에 들어감은 우리 자신이 세례의 결과 얻게 되는 승리의 시초적 행동이며, 성서의 완성이다.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라고 하느님께서 장엄하게 선언하셨는데, 여기서 세례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며, 그분 마음에 드는 자식이 되게 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 죄인을 개별적으로 속량하고 새롭게 할 뿐 아니라, 홍해 바다에서처럼 새로운 민족, 하느님의 백성을 낳고 노아의 홍수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재생된 인간을 창조해주는 것이다.
4) 세례의 효과
① 새로운 생명으로의 탄생.
우리는 세례를 통해 새사람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죄악과 헛된 욕망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물의 의미에서 살펴보았듯이, 세례 때 물에 잠기는 것은 이러한 죽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또한 세례를 '신앙의 성사' 라고도 하는데, 이는 세례를 받을 때 크리스찬 공동체 앞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자신을 오로지 주 예수님께 온전히 내맡기는 의탁의 자세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받는 이는 온전히 예수님과 결합하여 자기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쳐 이기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할 새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세례의 이런 차원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세례전

    세례후

    낡은 인간(묵은 인간)

    새로운 인간

    자연적 생명의 죽음

    초자연적 생명의 탄생

    죄와 벌의 파괴와 소멸

    은총의 부여

    그리스도 무덤에 묻힘과 같이 죄에 대하여 묻힘

    그리스도 부활의 영광에 동참

② 하느님의 자녀, 상속자가 된다.
우리들은 세례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의 일원이 되고,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권리를 가지게 된다.
이는 로마서 8,15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몸을 이루는 우리들은 상호간에 깊은 사랑과 신뢰로서 생활하며, 함께 하느님의 생명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세례 성사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항상 무한한 신뢰감으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우선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은총으로써 하느님의 영광과 크신 사랑을 알고 굳게 믿어야 하며, 그리스도 부활로 인한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을 향하는 이 믿음과 사랑과 희망은 곧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깨끗해진 우리 마음을 보호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5) 세례 예식
- 첫 질문 ; 세례자의 진정한 의도를 확인하는 질문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확실한 믿음을 확인한다.
- 구마 기도 ; 진리와 사랑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온갖 악으로의 경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 끊는 예식과 신앙 고백 ; 세 번에 걸쳐 " 끊어 버립니까?"와 "믿습니다" 의 질문이 주어진다. 이것은 결단을 요구하는 질문으로, 즉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라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겠는가, 아니면 죄와 악의 지배를 받으며, 죽음의 길을 가겠는가를 최종적으로 결단하는 질문이다.
- 물로 씻음 ; 세례에서의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성삼위의 능력으로 원죄와 이전에 실제로 범한 죄를 씻어낸다.
- 기름 바름 ; 새로운 생명의 부패를 방지하도록 하는 거룩한 신분(왕직,예언직, 사제직)으로 축성됨을 뜻한다.
- 흰옷과 촛불 ; 새로이 받게 된 생명의 결백함을 뜻한다.
- 세례명 ; 예비신자가 세레를 받을 때 성인 성녀의 이름을 가짐으로써 그 성인 성녀의 생활을 본받기 위함이며, 따라서 자신의 신앙 생활을 한층 드높이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 이유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과 함께 새로이 영성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그 이름을 가진 성인 성녀의 도움과 전구를 청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을 때 유명한 성인 성녀들의 이름만 선택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보다 특성있는 성인 성녀의 생활을 알아보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분의 이름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또한 자신이 택한 세례명의 축일이 바로 그 성인 성녀의 축일이므로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 대부모 ; 견진 성사를 받은 사람으로서 세례를 줄 때 참석하여 세례받는 자를 영성적으로 인도할 것을 약속하는 사람으로 그 직무는 예비신자에게 복음의 실천을 자신의 생활과 사회 생활로 친절히 보여주고, 고통에서 도와주고, 예비신자를 보증하며 세례 성사 생활이 자라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6) 세례의 종류
① 어른들의 세례
성인들의 세례는 예비신자 시기라는 긴 시간을 두고 준비하게 된다. 여기에는 예비신자의 세례 요청이 성숙하고, 또 그의 원의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가르치는 교리로 밝혀질 수 있을 만큼 필요하고도 충분한 모든 시간을 할애한다. 이 교리는 점점 더 밀도 있게 행해지는 단계적 준비의 절차를 따른 예식을 수반한다. 이 예식은 모든 사람들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회개한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기 위하여 보통 사순절 시작 때,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참회예식 중에 거행된다.
② 유아 세례
세례성사로 부터 그리스도 교육은 시작되기에, 부모들은 자녀가 교회 안에 받아들여지고, 교회 안에서 자라나기를 원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어린이가 정신적 기능의 부족으로 아직 귀의와 신앙의 헌신이 불가능해서 세례의 특성인 개심과 신앙의 표징을 받아들일 수 없을지라도, 어린이는 어른에 의존하여 그 표징을 받아들이게 된다. 어린이들은 세례받을 때, 그들나름대로 은총과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께 결합되며, 그들나름으로 구속적 봉사를 위하여 구속적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축성된다. 이 모든 것은 이후의 그리스도 교육으로 개발되어야 하고, 세례 성사는 그 정신으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교육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③ 대 세
일반 성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몇 개월간 교리 강습을 받아서 신앙이 무엇이며 세례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죽을 위험에 있는 사람들은 일반 사람처럼 교리를 배울 수는 없다. 그런 경우 비상 조치로 주는 세례를 '대세'라고 하는데, 이 대세를 받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기본 교리를 일러주고 그것을 믿는다는 표시를 받아야 한다.
- 천주 존재, - 상선 벌악, - 삼위일체 교리, - 강생 구속.등이다.
이상 네 가지 교리를 다 가르칠 수 없고 벌써 환자가 의식을 잃었을 경우에는 그분이 옛날에 하느님을 믿을 뜻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조건부로 임종 비상 세례를 주어야 하는데, 조건부 세례는 이렇게 한다. "만일 당신이 세례를 받을만 하면,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
④ 혈 세
피로써 자신의 죄를 씻는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순교하는 숭고한 행동이다. 순교는 생명을 바치면서 신앙을 증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물로써 수세를 받지 못했어도 순교하면 즉각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⑤ 화 세
자기의 뜨거운 열성으로 자신의 죄를 씻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죽음이 임박하여 영세할 시간이 없고 그런 조건이 되어 있지 못할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상등 통해를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3. 세례의 필요성과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김으로써 부활의 영광에 이른 것과 같이 우리도 헛된 욕망과 세상적 삶에 너무 집착하는 나쁜 습성을 끊고 오직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하며, 이세상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새로운 영적 생명으로 재생되는 은혜를 입는 성사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며,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입문 성사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충실하게, 그리고 이웃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신비체인 교회의 구성원임을 절감함을 뜻하고, 교회를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 항상 복음에 충실하게 만들려고 노력함을 뜻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항상 보다 자유로워지고 인간적으로 되고, 보다 책임감 있게 되고, 보다 우정있는 사람들이 되고, 보다 행복한 사람들로 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함을 뜻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시기와 질투와 분노와 증오와 우월감을 버리고, 사회적 갈등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보존하면서,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살아감을 뜻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에로 건너감을 뜻하고, 다시 태어남을 뜻하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의 실현을 위해 노력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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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
2011. 6. 3. 23:12 교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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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사에서 성모 마리아의 위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서 하와는 하느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하였고, 그 결과 죽음이라는 벌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를 원죄라고 불리게 되었다. 구약성서는 이 원죄에서 인류를 해방하시고자 하느님께서 구세주와 그의 어머니가 될 한 여인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죄에 떨어진 원조에게 뱀의 머리를 짓밟을 여인이 약속되었고(창세3,15), 그 여인은 처녀로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임마누엘(주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로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를 가리킨다(이사7,14참조). 때가 차니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는데(갈라4,4-5참조), 그 여인이란 바로 악마의 머리를 밟아 죄악의 세력을 멸하고 승리할 구원자 그리스도의 모친이다.
루가복음 1장 26-38절을 보면 천사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인사한다. 마리아는 과연 은총을 가득하게 받으신 분이다. 이에 대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마리아는 대답한다. 마리아는 이 대답을 통하여 메시아를 잉태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성부와 본질이 같은 성자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인성(人性)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여 하느님의 구속사업을 수행하게 된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위치와 역할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구세주를 잉태하게 된 것이다. 구원사에서 마리아는 특이하고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리아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대망(待望)사상과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성취(成就) 사이에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인류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

2.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협력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시 여기며, 마리아의 자유로운 동의를 구한다.
마리아의 동의없이 하느님은 자신의 구원사업을 이루실 수 없다. 하느님의 계획과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자유로운 동의로부터 이루어진다. 따라서 마리아의 순명은 곧 하느님께 향한 자신의 온전한 '동정봉헌'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말대로 '정녕 복되신 분'(루가 1,35)이다. 복되신 마리아의 순명으로 아담과 하와로 부터 멀어진 하느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이어지게 되고 인류 구원의 역사는 마리아의 순명을 통하여 새롭게 전개되어 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어 오셨기에 원조의 죄를 '복된 죄'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인류에게 주셨다.
하느님은 한 여인을 세상에 보내어 당신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원죄로 잃었던 인류의 생명을 다시 찾아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리하여 한 인간(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죽음이 들어온 것을 한 인간(마리아)의 순명으로 죽음을 물리치고 인류에게 생명이 찾아오게 되었다. 즉,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구원의 매듭은 엉클어졌다. 하와의 불순명의 매듭은 마리아의 순명을 통해서 풀어졌다. 하와가 자신의 불신앙을 통해서 얽어 맨 것을 동정녀 마리아가 자신의 신앙을 통해서 풀어낸 것이다.

3. 마리아의 순명의 의미
마리아의 순종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구원의 주체이신 하느님이 죄 많은 인간들과 충만한 연대성을 맺도록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은 것(봉헌)이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순명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어머니,
구세주의 모친이 되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의 대답인 것이다. 자신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도 오직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과 결코 그르칠 수 없는 인도하심을 믿고 오로지 당신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며, 그것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 마리아의 대답이었으며, 거기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으로 하느님의 인류구원에 협력하였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내어놓는 신앙이기에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마지 못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받아들였던 것처럼 기쁘게 순종하는 자세를 배워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준 잃어버린 생명을 마리아의 응답으로 되찾게 되었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순명을 마리아에게서 배워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생명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한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명하여, 그동안 잃어버린 생명을 찾아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여야겠다.

4. 교회의 어머니요, 신앙인의 모범이신 마리아
아브라함은 오직 하느님께 순종하여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지상 여정을 걸음으로써 그 결과 그에게서 큰 민족이 이루어졌다(창세12.1-4참조). 하느님을 향한 그의 여정은 하나의 큰 백성을 이룬 시조가 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시공을 초월하여 '신앙의 아버지', 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 곧 바로 아브라함을 지칭한다. 이 귀한 호칭이 그에게 주어지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자기포기를 통하여 전 생애를 하느님께 의탁한 결과 이스라엘 민족 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아드님이 가신 그 길을 온전히 함께 걸어감으로써,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앙인이 되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신 분이며, 언제나 아드님 곁에 머물러 계셨다.(우리들의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모든 어머니들은 한결 같이 자신이 낳은 자녀의 행동을 잊지 못한다.)
또한 마리아는 아드님의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이셨다.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의 운명을 지켜 보고 시신을 끌어 안으신다. 마리아는 아드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함께 동참하였다.
어머니가 가신 그 길은 모든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인생의 여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마리아가 우리 모두의 어머니임을 분명하게 말씀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이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6-27).

우리에게 나타나는 마리아의 모습은 하느님과 같은 자태, 기적의 아가씨 또는 초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한 한 인간, 한 여인의 본연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이때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제 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리아에게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는 한 사람의 참 인간상을 볼 수 있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길이 어떠한가를 항상 마리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성모님은 인간으로서 가장 가깝게 예수님의 뒤를 따르신 분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이다. 이 공경은 흠숭과는 다르다. 흠숭은 오직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만 드리는 것이지만, 공경은 모든 성인들에게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테스탄스 제교회에서 말하는 마리아께 대한 우상 숭배는 아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따르고 그 말씀을 지켰으며, 초대 교회에서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모든 신앙인은 최초의 신앙을 가진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며, 교회의 어머니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가장 완전하게 따른 분이 마리아이다.)
구세주의 모친이 가신 길 즉, 자신의 봉헌과 사랑, 봉사와 희생, 고통과 즐거움 등 인생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면서 살아간 마리아의 모습이 곧 우리들이 배워야 할 모델이며 과제가 되는 것이다.

5.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하여
성서에 근거를 둔 그리스도의 동정녀 잉태는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정통 신앙으로 고백하며 받아들여져(사도신경)왔다.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동정성은 단지 생물학적인 동정성(동정녀 잉태(單性生殖)란 고등생물체에서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나 자연과학적 입장(이 입장에 대해서는 말할 때 하느님은 어느 때라도 새로운 상황을 조성할 수 있으며, 이 상황을 자연발생 안에 삽입시킬 수 있다. 창조 개념으로부터 기적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연과학적 입장에서의 정당한 반론이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또는 신화론적 입장(한 인간의 여인과 신의 성적결합 또는 기적적 탄생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동정녀의 잉태와 탄생의 의미는 그리스도로 인한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에서 나오는 것임을 드러내는 징조이다. 또한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인간적 출생과 함께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역사를 통해서 이미 약속되었던 바로 그 아기였다는 것을 동정녀 잉태는 말해주는 것이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보통 인간의 탄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탄생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정녀로부터 탄생하였다'라는 신조의 깊은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동정녀 출생을 상징적 의미로 가르친다거나 동정녀 잉태의 사실성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마리아의 자유로운 신앙결단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단순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조건없이 신뢰하고, 진심으로 사랑한 모습을 신앙인들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하여 마리아처럼 "예"라고 응답하여야 한다.
이것이 평생 동정성의 핵심이며, 마리아의 신앙이다. 마리아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선사하며, 그래서 마리아는 어머니가 되고, 하느님은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마리아가 받아들임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며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듯이 우리 자신들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마리아는 신자들의 모친, 그리고 교회의 원형이 되며 모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문제는 과학적이며 생물학적인 동정성의 문제가 아니며, 또한 관건이 되는 것은 성(性)이 아니라 마리아의 신앙이다.
바로 마리아의 신앙에서 동정성을 찾아야 하며, 마리아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대답 즉,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1,38) 라고 한 대답 - 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라고 순종한 대답-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개신교에서 말하는 예수의 형제와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잘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한다. 이것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현세의 인간적 부친을 가지지 않았다는 정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생명과 존재의 창시자요 원천이신 성부께서 바로 예수의 인간적 실존의 유일한 기반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동정녀 출산을 거스르는 반론을 제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예수의 온전한 인간임이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성을 성부로부터 직접 받았기 때문에 안전하고 충만하게 받았다.

6. 마리아에 대한 신앙교의에 대하여
1) 마리아의 모성
오랜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문들은 한결같이 마리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라고 선포하였다. 이 교의는 413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대하게 교의로 선포 되었으며, 하느님을 낳으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것은 당연한다. 그러므로 '천주의 모친'이라는 호칭은 성자와 마리아의 밀접한 관계에서 분명하게 연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의 모성에 대하여 성모님은 몸으로보다 정신으로 먼저 잉태하였다. 마리아는 일차적으로 그녀의 절대적인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모친이 되었고 그 다음에 비로서 육체적으로 모친이 된 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서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시고 낳으시고 성전에서 성부께 바치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시며, 순명과 믿음과 희망과 불타는 사랑으로써 영혼들의 초자연적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온전히 독자적인 방법으로 구세주의 구세사업을 도와드렸다. 이 때문에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모친이 되시었다"라고 선포한다.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지닌 만큼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 된다.
2) 마리아의 무염시태(無染始胎)
마리아의 무염시태란 마리아가 처녀로 잉태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영원한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미리 구원사업에 참가하도록 선택된 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일체의 죄의 세력에서 구원받고 계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을 낳으실 어머니가 원죄에 물들었다면 태어나는 아들 또 한 죄의 세력에 물들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어머니는 죄의 세력에 물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1830년 7월 18일에 프랑스 파리의 까리따스 수녀원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셔서, 당신이 원죄없이 잉태되었음을 알려주셨다. 그리하여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 잉태 되시는 첫 순간,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미리 내다 보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특은을 베푸시어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셨다"고 선포하고 이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다.
마리아는 다른 이들이 세례 때 받는 은총을 출생 이전에 미리 입음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도록 불림받았다. 이 교리가 선포된지 4년 후에 성모님께서는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발현하시어 이를 다시 알려주셨다.
3) 성모몽소승천(蒙召昇天)
성모님의 몽소승천이란 성모 마리아가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은 것,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약속된 영원한 생명의 영광에 맨 먼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승천에 참여하게 된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승천은 스스로 하늘에 오르신 것이지만 마리아는 스스로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구별을 하기 위하여 몽소(蒙召)라는 말을 사용한다. 몽소승천은 마리아의 육신과 영혼 즉, 마리아의 인격이 전적으로 부활한 그리스도와 일치함을 뜻하는 것이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0년 11월 1일 일찍부터 교회가 믿어오던 마리아의 승천을 신조(信條)로서 선언하였다.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원죄 없으신 하느님의 모친은 지상생애를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에로 올림을 받으셨다." 마리아의 몽소승천은 "잠든 자들의 첫 열매요"(1고린15,20)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장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일치로서 누릴 종말적 구원이 마리아의 몽소승천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마리아는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일 뿐 아니라 지상에서 천상도성(天上都城)을 향해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지막 날에 성모님과 같이 부활하여 승천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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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