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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B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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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6.03 교회
2011. 6. 3. 23:11 교리공부

1. 인간 삶의 공동체적(共同體的) 성격
우리 속담을 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은 없다"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인간이면 누구나 날 때부터, 어느 한 집단이나 단체에 속할 수밖에 없는 인간본성을 잘 보여주는 일례라 생각된다.
실제로 인간은 스스로 결단하고 그 결단에 대한 책임성 있는 행위로써, 한 집단이나 공동체에 속하려는 열망을 갖고 그곳에 개인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이상(理想)과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고자 한다.
그런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이나 욕구가 공동체의 그것과 맞지 않을 때, 그로부터의 알력이나 긴장이 나타나기 때문에 독립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면 누구나 한편으로 집단이나 단체에 속하기를 열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독립하려는 양면성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집단이나 단체에 속하려는 열망이 이탈하려는 열망보다 강한 듯하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체계화된 사회에서는 협력과 봉사를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가고 삶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절실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집단"이나 "단체"라는 표현보다는 "공동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어떠한 공동체를 막론하고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특성이 있다.
먼저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요소로서, 신념의 하나됨과 그 목적의 일치, 그리고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방편을 쓰겠다는 의견의 일치가 그것이다. 즉, 가급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하다면 짧은 시간 안에 자기들이 믿는 것을 전달하여 공동체로서 커져야겠다는 목적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의 일치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단순히 공생(共生) 그 자체로서의 공동체가 아니라, 어떤 신념의 일치에서 나온 귀결로서, "같이 나누는 삶"이라는 성격을 띄는 공동체를 말한다.
공동체의 또 다른 특성으로는 자신들이 맡은 것과 그 맡은 것에 대하여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이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통념을 "교회"에 적용시켜 말할 수 있을까? 답변은 다양할 것이다. 이는 교회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교회의 본질에 관하여
1) "교회"의 어원과 그 유래
우선 '교회'(Ecclesia)라는 어원에 대하여 보자. 이 단어는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적인 개념이 아니었다가 점차 성서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적인 용어가 된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원래 희랍어인 이 단어는 정치적인 의미로서 '민족 집합체'를 의미했다. 이 단어를 2세기에 라틴어 성서(70인역)로 번역하면서, 어의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Contio' 혹은 'Comitio'(정치적 집단으로서의 '집회')로 쓰지 않고, '유대인의 회당'(Syagogue), '예식단체', '하느님 백성의 전체 공동체'라는 의미로 도입함으로써 아직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날까지도 통용되는 영어의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공번된', '보편적인'을 뜻하는 'Catholicus'에서 나온 표현으로서, 어떤 특수한 민족이나 지역에만 해당되지 않고 모든 민족과 지역을 망라하여 "모든 것을 포용하는 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는 단지 개인적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다. "교회"라는 의미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상의 표현이며 동시에 공동체로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적인 결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공동체이며,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의 공동생활의 실천과 관계있는 것으로서 온 인류의 안녕과 기원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 - 지상 생애 동안의 예수
예수는 마르꼬 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1,15)라는, 간결한 말씀으로 자신의 원의가 무엇인지를 요약하고 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설교와 그의 공적인 활동을 통한 본래의 임무는 "하느님 나라"로서, 이 단어는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개념이 지니는 본래 의미와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와 관련해서 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열 두 사도의 선발(마르 3,13; 6.7-13)을 통해서도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예수는 선발된 열 두 사도로 하여금 그 자신이 행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세력을 나타내는 징표로, 악신을 몰아내게 하는 힘과 함께 병자들을 치유하는 능력을 준다. 열두 제자의 선발은 예수의 이스라엘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암시한다. 예수는 이 열 둘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고자 하며 길 잃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것이다.
한편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개념을 민족 복고주의적인 면모로서 만이 아니라,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유대 민족으로부터 이 개념을 정화하였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 8,11의 이방인들을 상대로 행한 제자들의 선교활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데에 있다. 즉,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의 구원행위 속에서, 그의 구마 행위와 병자치유 속에서, 지금 이미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다스림은 구체적인 한 백성을 관통하게 되며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은 "하느님 나라"와 확고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항상 하나의 백성을 전제로 하고 이 백성을 통해서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가운데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여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뒤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가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되면서부터 예수와 함께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해야 할 소임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가 선포하고 구현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고 그 내용은 무엇인지 대강 윤곽이 잡힌 셈이다. 성서학자들이 원칙적인 관점에 일치하고 있는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수 설교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는 완전히 현실화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가까이 왔다"는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통치"를 말한다.
둘째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신이 최고의 주권을 행사하는 완전히 자유롭고 충만한 최고의 권능행사를 의미한다. 그렇게 때문에 하느님이 그곳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를 약속하시며, 인간은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하느님 나라"는 지상적인 현세의 민족적 신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충실성, 즉 하느님과 타인들과의 친교에 그 참 뜻이 있는 순수한 종교적 다스림이다.
넷째로, "하느님 나라"는 만민에게 희소식을 전하는 "복음"이며 그 조건이 되는 것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나라"는 어떤 도덕적 법 규정에로의 요청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배와 현세의 지배 중에서 택일해야 하는 요구, 즉 "하느님을 향한 회개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3) "하느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 -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자기이해
(1) 하느님 백성
예수가 십자가 형에 처형되고 부활한 이후에,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여기서부터 구체적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30-100년)는 일차적으로 부활사건이 발생했던 갈릴레아 지역에서가 아니라 수도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인 계시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 그곳에서 경이적인 성령을 체험하였으며 이로부터 모두가 하느님께 사로 잡히고 공동체 상호간에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예수가 선포하고 구현한, "하느님 나라"와의 연관성하에서 자신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열 두 지파와 관계있는 사고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였을 때는, 열 두 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와 벤자민 지파 그리고 레위 지파의 절반만이 존재할 뿐, 더 이상 열 두 지파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시기에 열 두 부족이 완전히 재건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여기서 열 두 제자와 같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로의 초청에 응답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봉사하는 협력자들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는데 있어서의 조력자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적으로 예수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또 하나의 기능이 이들 공동체에 추가되기에 이른다 . 즉, 그들에게 본래 전 이스라엘에서 발생해야만 하는 이들,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전적인 헌신, 새로운 생활 질서에로의 회개, 형제·자매적 공동체에로의 모임 등의 일을 표징적으로 드러내야 할 사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제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종말론적이며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세계의 일반적 사회질서 속에서 타당성을 인정받고 통용되는 지배구조를 배격하고 상이한 유형의 공동체 구조를 구성해야 하는 소명을 받기에 이른다.
(2) 그리스도의 몸
사도 성 바울로의 서간에서 주로 발견되는 이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체 일원간에 일치의 근본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먼저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모든 사람이 한 몸이 되었음을 말하 고 있고(갈라 3,23-28), 창녀와의 결합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대조시키면서, 공동체 일원이 그의 몸과 합일되는 지체임을 말하고 있다(1고린 6,15- 17).
한편 바울로 사도는 이 개념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머리이며 세속적인 원리를 벗어버린 그리스도인은 그의 부르심을 받아서 한 몸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구절들을 보면,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와 공동체와의 관계로 보고 있으며 공동체가 사회적 집단으로서 보다는 구원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천상적 실재로서, 이 안에서 공동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동체와 그리스도는 "몸"으로 볼 때에, 서로 구별 지을 수 없는 상호관계가 성립되고(에페 1,22-23; 골로 1,18), 그리스도는 공동체가 그리로 향해 나아가는 원천과 목표이며(에페 4,15-16), 그리스도는 몸을 지배하는 머리 역할을 하는 가운데 공동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몸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예배와 하느님 말씀의 선포, 공동체 상호간에 교제하는 일,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
-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 양식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으므로(사도 21,20), 교회의 초기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되었다. 즉, 어린이들은 할례를 받고 경신례의 규범을 지키면서 안식일을 쉬는 날로 지켰고, 성전에서 모여 매일 암송하는 기도에 참석하였다(사도 2,4-6; 3,1; 5,21).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 그들 자신의 생활을 가진 공동체를 형성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성령이 드러나는, 하느님이 거주하시는 새로운 "성전"(1베드 2,5)으로서, 새롭고
독특한 나름내로의 형태를 지니면서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생활구조를 갖고 살았다.
(1) 예배와 하느님 말씀의 선포
사도행전에 의하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안식일에 공동기도에 참석한 다음(20,7), 개인 집에서 그들만의 집회를 가졌음을 전하고 있다(2,46; 12,12; 16,40; 20,8). 그리고 다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2,42)고 한다.
집회는 흔히 훈시와 예절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훈시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세례 전 예비신자 교리교육과,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한 강론이 있었다. 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메시아성을 강조하는 것이었고(2,23-26), 그 외에도 신앙과 애덕실천을 위한 훈계(14,22; 16,3) 혹은 용서, 그리고 좀더 친밀한 담화를 담은 권고 및 윤리교육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주로 사도들이 맡았다.
그리고 예절부분은 친교, 빵을 나눔, 기도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부유한 구성원들은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가난한 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러한 실천은 교육정도, 지방, 신분이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동체 정신을 강화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거리감과 여기에 따라오는 상호간의 장벽을 예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서, 후에 "성찬례"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것을 집전하는 사람이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빵과 포도주 위에 손을 펴들고 "최후의 만찬"에서 하셨던 예수의 말씀(1고린 11,23-26)을 빌어 축복하였다는 데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예식을 통해서 그들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지고의 사랑을 기억하게 되고,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게 됨으로써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일원은, 이를 통해서 한데 뭉치고 그리스도의 근본에 공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신강림으로 인하여 그들 안에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이후에 계속되는 복음선포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되었고, 이러한 진술의 내용은 곧 복음선포의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사도들은 하느님의 업적인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 목격자로 자처하면서(사도 2,32; 3,1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그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증거하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종말에 하느님의 계획을 완수하기 위하여 재림하므로, 그동안에 인간의 응답으로서 개인의 속죄와 용서, 그리고 세례를 제시하였다.
또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일원들은 사도들이 제시한 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에서도 산상설교(마태 5 - 7 장)의 여덟가지 행복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율법 완성, 용서와 간음, 이혼과 거짓 맹세에 관한 금령과 보복에 대한 금령, 원수에 대한 사랑, 자선과 기도, 단식에 대한 가르침, 물질에의 초탈,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 등을 권고받았으며, 특별히 마태오 복음 11,28-30의 말씀은 그들이 자주 회고하던 내용이었다.
(2) 공동체 상호간의 친교
공동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재원을 갖추는 것을 의미하는 친교로서의 생활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어서, 가난하고 곤궁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다양한 전승들 안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고 있다. 특별히 바울로 사도의 예루살렘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모금운동을 벌였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성령강림 이후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줌으로써 얻는 기쁨"을 경험한 사실을 보여준다(사도 2,44이하). 이러한 묘사로써 사도행전은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이상적인 공동체상(像)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역시 "애덕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예로 바르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서 받은 돈을 사도들에게 바침으로써(사도 4,26- 27) 사도들의 제자, 더 나아가서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선교 지도자로서 공동체 활동에 봉사하게 된다. 반대로 아나니아와 삽피라 부부는 땅을 팔아 돈의 일부만을 바쳤기 때문에(사도 5,1-2) 죽음의 벌을 받았다(사도 5,5). 물론 이 사건으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재산공유가, "공산주의"나 "집산주의"의 표현으로 보이는 단면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재산의 공동소유는 새로운 신앙의 열정에서 생긴 형제적 사랑의 자의적 원칙으로서 결코 의무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나니아 부부의 죽음은 사도들과 공동체, 무엇보다 하느님을 속인 결과였고(사도 5,4), 성령을 떠보는 죄의 결과(사도 5,9)였다. 따라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러한 생활은 공동생활의 원형이며 지배관계에서 해방된 성공적인 상호친교의 원형으로서, 무엇보다도 이런 사유재산의 집단의 집착에 따른 공동소유는 강제성이 아니라, 자발성을 전제로 하며 상호부조의 행위는 협동정신과 형제적 사랑 및 약속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종말론적 사상과 함께 현세재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감화되어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만 원조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원조받음으로써 서로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부상조의 정신은, 자진해서 바치는 구제금이나 헌금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친교를 나누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3) 이웃에 대한 봉사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구체적인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뿐 아니라, 그들의 근본 직능, 직무, 과업, 사명을 기술하는데 있어서도, "봉사"하는 개념을 쓰고 있다. 이 단어는 인간이면 누구나가 즉시 굴종을 연상하게 마련인 하나의 행동, 즉 식사 시중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설교 안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식사시중을 드는 가운데 사람들끼리 존재하는 지배관계, 즉 봉사받는 사람과 시중을 들어 야 하는 사람들과의 구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루가 17,7-9).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행위를 종 노릇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집니다"(마태 23,13)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인간실존의 가치전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가 하느님의 봉사적 실존의 원형을 친히 비유해 주는 인물로 등장하며 제자들과 공동체에 모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고(루가 22,24-29), 또한 예수가 봉사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고 있다는 것이 공동체 실존의 척도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단순히 식사시중이나 부양과 생계를 돌보는 자선행위만이 아니라 살거나 죽거나 그 어떤 때이던지 간에 "남을 위한 존재", 즉 처음부터 자신의 근본은 자기 인격을 다 바쳐 "타인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발견되는 것이다(마르 10,45; 마태 20,28; 요한 12,25-26).
그러므로 봉사를 통해서 온갖 집단들이 이해관계와 신분의 차별, 성(性)의 우열같은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장벽들이 지양되기에 이른다(갈라 3,26-29). 바로 이러한 점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섬기는 일", 즉 "남에 대한 헌신과 사랑 속에서 사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교회의 본질
지상생애 동안에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그 나라에 속하는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고자 의도하였고,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러한 예수의 선포와 행적에 입각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면서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양식을 갖고 살았다. 그 생활양식이란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예배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또 그들의 친교는 공동식사(성찬례)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소명을 기억하면서 자아의식을 새롭게 하였는데, 이런 의식은 성찬례를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자기소유의 개념을 뛰어넘어,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고 돕는 봉사의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였으며, 그들이 구제를 위해서 헌금을 할 때에도 헌금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바침으로써 세상을 위한 증거와 선교의 사명을 다하였다.
물론 이러한 점은 예배의 모임을 통해서 그들의 사명에 대한 일깨움을 얻고, 영적 친교의 증진을 통해서 공동체의 친교와 봉사는 세상을 섬기는 데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4. 교회의 특징
1) 하나인 교회(唯一性)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보호하심을 약속하시며(성령강림), 당신이 세우신 교회가 이 세상 마칠 때까지 세상 방방곡곡에 전파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길 원하셨다. 그런데 천주교회만이 같은 신앙, 같은 전례, 같은 가르침, 같은 제도를 가지고 하나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
즉, 전세계 9억 이상의 천주교회 신자들은 어떠한 파벌의식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님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완성자'라는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미국이나 프랑스나 한국이나 온 세계의 천주교회는 그 가르치는 교리나 종교의식(미사)이 동일하고 같은 성사 같은 기도 안에서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세계 천주교회의 외적인 일치는 곧 천주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 그리스도교라는 좋은 예이다.
2) 거룩한 교회(聖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이 공동체가 거룩한 것이 되기를 원하셨다. 이 거룩함은 바로 천주교회 안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 안에서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을 거룩하게 변화(성화)시켜 주신다. 천주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표현하는 내용으로서 미사와 일곱 가지의 성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당 안에서는 잡스러운 행동이 용납되질 않으며, 하느님께서 자리하여 계시는 성당에서 최대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천주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다. 즉, 천주교회의 역사를 보면 무수히 많은 성인·성녀들이 배출되었다. 이것은 천주교회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3) 공번되고 보편적인 교회(普遍性)
천주교회는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의 한국 명칭이다. '가톨릭'이란 단어의 뜻은 '보편적·공번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교회(라틴어로 ECCLESIA)라는 단어에는 '하느님으로부터 호출되어 모인 백성들의 무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천주교회는 처음부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 인류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모여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무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전세계에 퍼져 있으며, 공동체가 생긴 이래 인종과 민족, 성별과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전인류를 위해 존재해 온 것이다.
4) 사도로부터 계승된 교회(使徒繼承性)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파가 약 500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많은 그리스도교 종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시고 당신의 공동체를 맡겨주신 열 두 제자들에 의해서 유지되어 온 공동체는 천주교회 뿐이다. 특히 천주교회의 주교님들은 열 두 제자들을 대리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직책이다. 이 사실의 증거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5.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의무
하느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선포와 행적을 통하여, 당신을 따르던 몇몇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백성을 모으고자 하심으로써 교회를 창설하셨다.
우리 역시 이러한 기쁨과 사랑의 공동체에 초대를 받아 오게 된 것이며, 이곳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그분을 따르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인간역사 안에서 존재하는 한, 인간적인 동기와 한계에 제약을 받는, 인간에 의해서 구성되고 관리되므로 그 자체 내에는 한계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결합과 일치가 그 목표이지만 아직은 완성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자기이해와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양식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완성에 이르도록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자신이 선포하는 바를 낱낱이 실천하고 있지 못하고, 하나인 교회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실정이며, 여러 지체들간의 일치와 형제애가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는 상태이다. 교회의 참된 본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러한 현실들은, 교회를 이루는 각 구성원인 우리들이 헤쳐 나가야 할 임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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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kto